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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일대는 삼한과 삼국초기 또는 백제의 유적은 없는 가고구려가 아차산에 보루성 쌓고 주둔할 이유가 없어.

백제가 한성 지역에서 공주로 천도를 했을 무렵

고구려가 아차산에 보루성 쌓고 주둔할 이유가 없어.

 

학자는 학설로 편 가르기를 하고 정치인들은 정략적으로

개인은 재산권을 위해서 지금까지 백제사를 왜곡 방치해

 

아차산 유적이 어떤 성격의 유적인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남시의 유적들이 모두 신라나 고구려 심지어 고려시대 유적으로만 발표를 해왔던 문제점에서 다른 주변 유적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하남시에는 백제의 유물이 한 점도 발견된 적이 없다고 발언한 사람이 계속 남한산성을 발굴하였던 만큼 우리의 현주소를 잘 알 수 있는 발굴이 되고 있다.

이성산성을 이해 하고자 한다면 가까운 유적들을 먼저 알지 않으면 혼란이 오며, 유적은 연계성이 있기 때문에 관련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아차산의 수많은 보루성 들은 어느 나라가 쌓은 유적일까 지금까지 아차산 보루성이라면 고구려와 관련된 성이라고 알고 있다.

구리시에서 광계토대왕의 동상까지 세우고 요란하게 고구려 유적으로 거리 홍보를 하고 있으며 언론으로도 고구려 유적으로 오랫동안 발표한 유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치밀한 검토와 토론이 없었고 또한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일방적으로 밀어 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차산 보루성을 고구려 유적이라고 희대의 해프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성이라고 할 수 없는 식민사학의 학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차산 보루성 유적을 식민사학의 위치에서는 고구려 이외의 다른 나라의 유적이라 할지라도 바른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신라의 유적이라고 하기엔 방향이 맞지 않고, 또한 삼국초기의 백제나 낙랑, 말갈의 유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삼국초기를 인정하지 않는 학설과 인식에서 제외되어 있는 학설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식민사학에서는 아차산 보루성을 고구려 이외는 달리 표현을 할 수 없기에 고구려가 한강권에 진출한 5세기 또는 6세기의 보루성과 관련된 유물이라고 왜곡하는 것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나 5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앞선 시대의 유물을 두고 고구려 유물이라고 하므로 서 쉽게 탄로가 날 수 밖에 없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물의 시대 설정도 왜곡을 하지 않으면 탄로가 나기 때문에 역사 왜곡과 함께 유물 왜곡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 설정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단순한 유물 중에 연질과 경질의 토기 구분이다.

연질과 결질의 토기 구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대를 어느 정도 구분해 놓으면 지금까지 왜곡한 내용들이 탄로가 나기 때문이다.

경질과 연질 토기나 와편의 시대 구분을 하지 않고 모호하게 하거나 무시하면 역사 왜곡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질 토기나 와편을 6세기의 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수 백년 동안 자유자재로 시대 설정을 하므로 서 역사 왜곡이 가능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설득력이 약한 애매모호한 토기 형태를 기준으로 주장을 하여 발굴자의 주관대로 시대를 설정하는 왜곡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연질 토기가 모두 출토되는 아차산 보루성 유적을 6세기의 고구려 시대로 설정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적을 왜곡하는 현상이 쉽게 일어나고 있다.

연질 토기와 경질 토기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로서 지금의 첨단 컴퓨터 보다 더 요긴하고 절실한 생활 도구로서 경질의 출현으로 연질 토기를 오랫동안 사용하기 어렵다.

연질 토기만을 사용하거나 경질 토기만을 사용한 유물만이 출토된다면 시대구분은 명확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예로서 가야 시대(〜 562년 멸망)의 토기는 대부분 쇠 소리가 날 만큼 경질로서 이와 비교를 한다면, 1000도가 넘는 온도의 철기를 제조 하면서 경질 토기는 자연스럽게 얼마지 않아 생산 할 수 있는 기술 구조이다.

그러므로 연질 토기만이 출토되는 아차산 보루성 들을 6세기의 고구려 성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왜곡의 도를 넘고 있다.

또한 역사를 깊이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남쪽에는 백제가 있었으니 그 반대편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하면 무난하게 받아 들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제왕도 앞에 수많은 보루성을 쌓고 오랫동안 있다든가, 백제의 왕도가 공주로 천도하였을 당시에 천혜의 한강 경계선을 두고 수락산이나 불암산에 보루성을 쌓고 고구려가 오랫동안 주둔하였다는 것도 불합리 한 위치선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나라의 발굴은 발굴자가 자신의 학설에 맞추어 아무리 오판을 하여도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상충된 토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민족사를 왜곡한 것이 탄로가 나기 때문에 유물의 시대까지도 애매하게 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를 들면 거북선 총통 위조 사건으로, 가짜를 만들어 바다 속에 넣은 지 얼마 후에 부식되지 않고 생생한 것을 꺼내어 400년 동안 바다 속에 있었던 유물이라고 하여도 누구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부식이 되지 않고 글자까지 완연한 총통을 임진왜란 때의 유물이라고 국보지정 까지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위조된 내막을 알고 있는 어부의 고발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 탄로가 나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감정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유물까지도 역사학계에서는 누구 한사람 강하게 주장을 하지 못하였다.

또한 아무리 조작을 하여도 어느 누구도 문제를 삼지 않는 다는 풍토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범행을 시도한 것이다.

심지어 학문적인 것은 더욱 말 할 수 없이 왜곡이 심하고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것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는 데는 종합적인 사고와 논리로서 규명하여야 함에도 학문이 힘에 의해서 좌우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고 조금만 검토를 해보면 아차산 보루성들은 고구려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한강권에 백제를 치고자 내려온 병력의 규모는 대병력으로 일시에 침공을 하였다는 기록이며, 아차산은 백제의 왕도 문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발상이 되고 있다.

고대전은 대규모로 침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백제의 왕도 앞이거나 아니면 공주로 천도한 백제라 할지라도 군사는 보급이 수급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보루성을 고구려 군사유적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백제 왕도를 함락한 후에 신라로부터 구원병 일만명을 얻어서 돌아온 백제의 문주왕이 한성지역에 도달하자 고구려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한성이 파괴되어 도읍을 정할 수 없어 공주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는 기록에서도 고구려는 영토 보다 정복전쟁을 우선으로 대규모 침공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아차산은 백제왕도 앞이기에 백제시대나 그 이후에도 보루성과 같은 단 몇 십명이 오랫동안 성을 축조하여 고구려가 주둔 할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백제가 한강권에 있을 때는 왕도의 문전이고 백제가 공주로 천도 하였을 시에는 보루성을 많이 축조할 이유가 없는 위치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왕도 앞에서 충돌하는 시기는 강성한 시기의 5세기 말로서 보루성을 축조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시기는 아니다.

특히 집수정과 온돌을 놓고 백제의 왕도 앞에 소규모 병력으로 지탱 할 수 있다고 보는 자체가 문제의 발상이 되고 있다.

고대의 군사 활동은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은 백제의 왕도 문전에 소규모 병력이 오랫동안 있을 수 없는 것은 보급물자 수급과 군사 지원 등에서 장기간 기거 할 수 없다.

소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위치는 소규모 국가 시대이거나 변방에서만 있을 수 있는 군사 활동이다.

또한 백제가 한성 지역에서 공주로 천도를 했을 무렵에는 고구려가 아차산에 보루성을 여러곳에 쌓고 주둔할 이유가 없다.

고구려와 같은 큰 규모의 국가는 적을 막기에 적합한 한강을 두고 아차산이나 수락산에 주둔 한다는 것은 위치상 적합하지 않는 위치다.

아차산 보루성 들이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성들이라는 것에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아차산과 연결된 용마산, 불암산, 수락산 일대에는 20여개가 넘는 보루성들이 지금까지 발견되었고 앞으로 정밀 조사를 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 많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최근 구리시와 인접한 남양주 일대를 조사한 결과 보루성과 수많은 성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러한 성들은 북쪽을 막아내기 위한 차단성으로 백제의 성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남양주에서 조사된 유적은 아래와 같다.

 

<최근 찾아낸 유적>

(1) 진관리 토성, (2) 퇴계원 토성, (3) 뱅이 토성, (4) 천겸산성, (5) 내각리 토성, (6) 선돌산성, (7) 진벌리 토성, (8) 철마산성, (9) 천마 산성 및 송라산성, (10) 월문리 내치성 및 차단성, (11) 문안산 토성, (12) 예봉산 조동성

 

<이전에 조사된 성>

(1) 봉화산 보루성, (2) 안산 보루성, (3) 도곡리 토성, (4) 역촌토성

(5) 예봉산 보루성, (6) 마현보루성, (7) 용진 토성, (8) 진중리 토성

 

남양주 일대를 세밀하게 조사를 하게 되면 위의 성들보다 더 많이 발견될 것으로 보여 지는 곳이다.

특히 천마산성은 둘레가 약 13km 정도이며 면적은 여의도 약 1.2배나 되는 성으로 한강 유역에서는 규모가 제일 큰 성이 발견된 것이다.

백제 왕도와 제일 가까운 문전이기에 당연이 이러한 규모의 성들이 발견되어야 하며 이러한 성들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남양주 일대의 수많은 백제시대의 성들이 곳곳마다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아차산에도 수많은 백제시대의 성이 있었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15년간 7곳을 발굴한 결과 보루성들이 모두 고구려 성이라고 발표를 하므로 서 문제의 심각성이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강권에서 각축전이 가장 심했던 삼한시대나 삼국초기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삼국 초기나 삼한시대의 성들이 곳곳마다 발견이 되고 심지어 기원전 수 백년전의 청동기 이전의 성들도 발견이 되고 있음에도 아차산 일대는 6세기 고구려의 보루성 유적밖에 없는 것으로 발굴 결과를 발표하고 있기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알 수 있다.

안성시 양성면에서 발견된 마한의 왕도를 지키는 반제리 산상의 군사 성터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삼한시대 얼마나 각축전이 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왕도의 도성 과 연계된 산성이 함께 발견되고 있는 점에서도 삼한시대의 성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발굴에서는 삼국이전의 유적에 대해서는 함구하다시피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식민사관의 역사는 삼국초기 이상 올라가는 유적과 유물은 역사에서 제외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강권에서 삼한시대의 토성으로는 둘레 540m 직경 180m의 규모가 작은 고개 길목의 토성이다.

위치는 양천구 신정동 정랑고개로서 삼한 시대의 유물이 산재된 소금 통로의 토성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유물이라는 명칭조차 없는 고고학이 되어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한반도와 연결된 중국에는 우리의 삼한시대와 동일한 진(秦)나라 시기(기원전 221〜기원전 206년)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도 우리는 성을 쌓을 줄 모르거나 해당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은폐를 하고 있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잘못된 문제점을 고치려 하는 것보다 계속 밀어 붙이는 병폐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역사의 결과는 민족사를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 아래의 내용에서 도 알 수 있다.

1) 아차산에서 규모가 제일 큰 시루봉 보루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1세기 이전을 추정할 수 있는 연질 토기가 발굴되었음에도 6세기 고구려 성이라고 발표를 하므로 서 시대가 전혀 맞지 않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권에 내려온 시기는 5세기 말이며, 그 당시는 연질 토기가 아닌 경질 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아주 단순한 기본적인 유물에 이르기까지 왜곡하고 있다.

아차산 4보루성 유물도 같은 연질 토기로서 고구려가 남하한 시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유물이다.

2) 지금까지 아차산 일대를 15년간 7곳을 발굴한 결과 보루성 모두가 고구려 유적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그이전의 역사 유적은 없다는 결론에서 식민 사학의 범주를 답습하고 있다.

한강권은 삼국이전에도 가장 각축전이 심했던 지역임을『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알 수 있음에도 심층적으로,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3)발굴자의 주장대로 모두가 고구려의 보루성이라면, 고구려가 오랫동안 소규모의 보루성을 쌓고 국지전을 전개한 내용이 된다.

그러나 고구려가 오랫동안 아차산에서 소규모의 국지전을 전개할 상황이 아닌 것은 대병력으로 일시에 공격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로 천도를 하였다.

아차산은 백제 왕도의 문전으로 소규모 병력이 보루성을 쌓고 오랫동안 주둔하는 전쟁의 양상은 있을 수 없는 지역이다.

또한 백제가 공주를 천도 했을 무렵에도 고구려가 소규모의 보루성을 많이 쌓고 오랫동안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다음과 같이 위치적으로 고구려 유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4) 보루성 중에 용마산과 수락산 보루성은 한강보다 중랑천과 마들 평야를 장악하기 위한 위치이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병력과 강대국인 고구려가 소규모의 병력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한강변을 지척에 두고 마들 평야를 조망하는 보루성을 축성한 것은 대병력의 고구려와 부합이 되지 않는 위치의 보루성이다.

보루성은 소규모 병력이 충돌하는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하기 위한 시설로서 한강변이 아닌 수락산 보루성은 위치적으로 남북이 아닌 동쪽과 서쪽을 차단하는 세력권이 조성할 수 있는 유적이다.

5) 시루봉 보루성의 특징은 성벽에 붙여 판석으로 배수로를 조성한 석성으로 지금까지 아차산 이외는 발견된 적이 없을 만큼 성 축조 방식에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면이 있다.

이러한 것은 시대를 달리하거나 문화가 다른 축성방식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6) 아차산 시루봉 성의 축조 방법도 고구려나 백제에서 보기 드문

소규모 여러 단계로 축성한 성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단계로 축성한 성은 대부분 소국의 유적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되고 있다.

예 : (1) 춘천 맥국의 산성, (2) 진주 대평면 대평리 성 유적, (3) 진주시 고성산성,

7) 유물의 밀집도가 낮고 대형 토기가 발견되지 않는 다는 것도 연질 토기를 사용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6세기 고구려와는 관련이 없는 유물이다.

8) 워커힐의 아차산 백제시대의 성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물은 경질 토기가 많아 보루성에서 출토된 연질 토기와 비교를 하면 보루성 유물이 훨씬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다.

이러한 차이는 아차산 백제의 성 축조 보다 앞선 보루성임을 입증하고 있어, 보루성은 고구려 유적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9) 현 식민사학은 민족사를 축소하기 위하여 삼한시대나 삼국초기의 역사를 거론하기 어려운 학문구조이다.

그러므로 한강권은 삼한시대의 군사 유적은 제외되었고, 아차산의 작은 보루성까지 6세기의 고구려 유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10) 고구려는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보다 굴복시키는 정복전쟁이 많은 만큼 아차산에 보루성을 쌓고 오랫동안 주둔하는 국지전을 전개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고구려가 영토를 차지하려 한다면 만주지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열려 있는 나라이다.

11) 최근에 구리시와 인접한 남양주 일대를 조사한 결과 보루성과 함께 백제시대의 차단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많은 토성의 군사 시설들이 남양주 전 지역 곳곳마다 발견되고 있고, 아차산보다 훨씬 거리가 먼 포천 쪽의 남양주에도 백제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보다 중요한 아차산 북쪽에 백제 유적과 관련된 내용은 없고 고구려 보루성만 부각 시키는 것은 허위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왜곡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예로서 하남시에서 백제의 왕도를 3년간 발굴하면서도 하나같이 은폐하였고 소규모의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을 왕도라고 계속주장 축소해왔던 전과에서 도 알 수 있다.

세계에서도 유래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슬픈 일이 되고 있다.

위와 같은 내용에서 본다면 아차산 보루성 들은 소규모의 세력들이 장기간 서로 대치하고 있었거나 백제초기의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는 유적이라는 것을 유물과 유적에서 입증되고 있다.

필자가 많은 유적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유물을 판독 할줄 알기 때문에 마한의 왕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것은 500년 이상 확연히 차이가 나는 유물을 두고 논하는 것조차 문제의 심각성이 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문헌 기록과 대조해 보면 한강권은 삼한시대 소국들이 얼마나 각축전이 심한 지역인가를 알 수 있어 그 당시 말갈과 낙랑 마한의 제반 세력인 백제 초기 등이 어우러지면서 백제가 한강 북쪽에서 견디지 못하고 하남으로 천도할 만큼 각축전이 심했던 곳이다.

아차산 보루성들이 고구려의 6세기 유적으로 발표를 하므로 서 그 이전에는 다른 군사 유적이 없다는 결론이 얼마나 문제점이 많은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한강권 유적을 두고 고구려나 신라의 유적으로만 치부하므로 서 한강본류 백제시대의 큰 성은 모두 몽촌과 풍납토성 밖에 없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 왔던 시각이다.

심각성을 알 수 있는 것은 발굴까지 한 하남시의 유적을 은폐하면서 그 동안 풍납토성의 왕성설을 주장하면서, 최근에는 한강권에서는 백제의 왕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학문적인 양심이 없는 가를 알 수 있다.

이성산성이 인근의 다른 유적과 관련되어 왜곡이 얼마나 심한가를 살펴본 내용들로서, 백제사 전채를 축소말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왜곡들이 세계에서 유일한 이성산성의 문화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위상에 이르기 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민족의 우수성까지 저해하면서 진리를 외면하는 발상이 도를 넘고 있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술적인 문제는 일반인들은 구별하기 어렵고 내용을 잘 모르기에 힘의 논리에 의하여 왜곡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것을 단절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쉽게 알 수 있는 단순한 유적을 두고 결판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 고분이다.

무덤은 다른 유적과 달리 구분이 단순하므로 진위 여부를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택하게 된 유적은 지금까지 한강권에는 일본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없다고 학계에서 단정 하였고 하나의 정설이 되어 이를 뒤집는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싸움이 있었다.

그것도 발굴하여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이 나버린 유적을 두고 전방후원분이라고 주장을 하므로 서 반발이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들이 모두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 발굴에 의하여 밝혀지자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1년 후에 또 다른 전방후원분을 암암리에 발굴한 결과 전방후원분임이 명확하게 밝혀지자 더 이상 문제를 삼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방후원분, 시민단체 강제 발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 없는 크나큰 대사건이 되었다.

그 당시 사회단체에서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 걸려 있기에 물러 설 수 없었고, 발굴 조사한 강단사학에서도 그동안

조사 발굴하였기에 강하게 공식적으로 고분이 아니라고 언론을 통하여 반발까지 하였다.

이렇게 단순한 고분까지 판독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의도적인 왜곡을 하여 왔었다는 것이 하남시의 백제왕도의 유적과 전방후원분 사건으로 장기간 점차 확대 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유적을 너무 오랫동안 왜곡 부정하게 되면, 이에 반발하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복병을 자연스럽게 길러내는 토양이 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자는 학설로 편 가르기를 하고 정치인들은 정략적으로 개인은 재산권을 위해서 지금까지 백제사를 왜곡 방치하여 왔던 것이다. 진정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한종섭 글(지식경제부 선정 제16회 신지식인)

  

한상준  gjnews@gj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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