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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광주 하남이 백제 초기 도읍지인가?뒤 돌아본 역사이야기(1)<한상준>

 

광주신문은 최근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앞두고 광주와 하남의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잡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식민사관에 물든 슬픈 역사를 물려주지 않고, 왜 이곳 광주와 하남이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던가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광주의 역사를 알기 위해 위해서는 지금까지 하남 이성산성과 교산동 등 발굴과정에서 밝혀진 백제 초기 고대도시(대부분 역사사학계 백제 초기 도읍지 인정)와 연계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남한산성에 온조 사당 등 백제 초기왕과 관련된 것과 역사기록을 통해서 이곳 광주가 백제초기 도읍지였던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고 있지 않을뿐더러 그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서 묻혀버리고 누구하나 거론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슬픈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즉 그 동안 하남시 이성산성과 교산동을 중심으로 수많은 백제 초기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를 인정하려하지 않고 숨겨 버렸고, 이어 최근 남한산성 행궁지 발굴 당시에도 많은 백제의 유물이 발굴되었던 것을 은폐한 것은 그들의 움직임만 보아도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 건물지에서 수많은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다면 당연히 백제의 건물이 있었다는 뜻인데도 이를 숨겼던 것이다.

자신들의 학설에 맞추기 위해서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간단하게 처리하면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역사 학계의 현실이다.

거대한 백제 초기 왕도까지 발굴하고도 은폐하는 현실속에서 다른 것은 더 이상 거론하기 어려운 만큼 왜곡의 도를 넘어선 것 같아 안타깝다.

따라서 광주신문은 지금까지 지난 세월 잃어버렸던 초기 백제사를 유적과 유물 그리고 도시구조 등을 중심으로 되짚어 보고, 오랫동안 체험하고 연구하고 기록해 온 내용들을 알기 쉽게 서술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광주가 5백년 백제 초기 도읍지에서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30여회에 걸쳐 기획 특집으로 다루고자 한다. <편집자 주>

 

광주·하남시, ‘오방통치’ 땅이름 존재(1)

전국에서 유일, 2백여년 전까지 남아 있어

백제통치가 세운 일본에 정착 ‘아스카’ 지방서 나타나

 

광주시와 하남시 주변이 백제 초기 왕도의 행정명칭으로 사용해오던 5방 통치의 땅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백제의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오방 통치의 땅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곳이 바로 백제 초기 5백년 왕도이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현재 하남시 덕풍천 주변에 동부 서부 북부라는 지명이 교차하는 중심으로서 교산동 일대에 백제 근초고왕때 한산(남한산성)으로 천도하였던 남한산성이 중부이고 북부는 대부분 한강건너이며, 남부는 남한산 넘어 쪽으로서 그 지역에 독립된 행정명칭이 있어 방향성이 있는 땅이름이 부합되지 않아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부에 대한 기록은 한국 땅이름학회 사전 중부면 편에 경기 광주 18개의 동리 중에 <동 서 중 남 북부>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또 현재까지 동부 서부 중부라는 행정구역이 전해져 왔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면이 크며, 우리나라에서는 방향성이 있는 명칭으로서 동시대에 동 서 남 북 중부 등으로 나타나는 지역은 오직 이곳 광주 하남 지역일 뿐 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것과 유사한 땅이름이 백제인들이 진출하여 고대국가를 세운 일본의 아스카 지방에서도 일본 지역 유일한 땅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백제의 통치제도가 일본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한 나라의 왕도라 함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통치와 수반된 많은 시설물들이 구비되지 않고서는 국가 운영을 수행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제정일치사회 일수록 왕은 지상의 신(神)으로 추앙 받았던 만큼 그 당시 사상과 관련된 계획적인 도시구조가 형성되어 있어야 만이 왕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왕과 관련된 종교시설과 백성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계획적인 도시구조와 보호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어야 만이 통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사회는 모든 통치구조가 왕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었던 만큼 이러한 도시구조가 광주시와 하남시 주변에 얼마나 남아 있으며, 삼국사기 기록과 어느 정도 유사한 것인가를 대조해 보면 광주와 하남이 백제의 초기 도읍지라는 사실여부를 확인 할 수 있다.

우선 행정 명칭을 백제시대의 기록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온조왕 31년(13) : 정월에 국내의 백성을 나누어 남북부(南北部)로 만들었다.

▷온조왕 33년(15) : 9월에 동서(東西) 두 개의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온조왕 41년(23) : 북부의 해루(海婁)를 우보로 삼았다.

▷다루왕 3년(30) : 동부의 홀우는 말갈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다루왕 10(37) : 북부의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다루왕 29년(56) : 2월에 왕은 동부에 명령하여...

▷초고왕 45년(210) : 2월에 적현성과 사도성의 두 성을 축조하고 동부의 민호를 옮겼다.

▷초고왕 48년(213) : 7월에 서부사람 회회(茴會)가 백녹을 잡아 바치므로...

▷초고왕 49년(214) : 9월에 왕은 북부의 진과를 명하여...

▷전지왕 13년(417) : 7월에 동부 2부의 사람들로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았는데...

▷비유왕 2년(428) : 2월에 왕은 4부를 순무하여 빈곤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하사하였다.

 

위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 건국 온조왕 때부터 한성시대 말기의 비유왕 때까지 동서남북에 행정단위로서 부(部)를 설치하여 통치해 왔던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오백년 가까이 이러한 행정단위를 사용하였다면 구역적인 변화는 시대에 따라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나 후대에서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헌 여지도서(與地圖書 1757~1765) 광주조 편 동부면에는 사창리 산곡리 덕풍리 황산리 둔지리 팔당리, 서부면에는 항동 춘장리(지금의 춘궁동 일부) 초덕리(지금의 초일동) 감천리(지금의 감북동 일부)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편리하게 수시로 개편하였지만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하남시에는 동부면과 서부면의 행정 명칭이 있으며, 덕풍천을 경계로 한강변은 동부면으로 그 이외는 서부면으로 구분했다.

또한 제언(提堰)편을 보면 화리동(禾里洞)제언과 연하제언(連河提堰)은 북부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에는 북부면이라는 명칭이 일부 남아 있었으며, 이와 같은 시기에 발행된 여지도(與地圖 1736~1776)의 지도에는 화리언과 연하언의 위치가 지금의 창우동과 덕풍동 사이의 한강변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금의 하남시 한강변에는 화리제방과 연하제방이 있었다는 것이며 그 위치가 북부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 온조왕 때부터 통치를 위해 왕도를 기준으로 이러한 행정명칭을 기준으로 구분하여 동서남북방향에 부를 설치해온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의 오방사상에서 중앙은 왕이라는 뜻에서 황색을 사용하였으며, 따라서 한나라의 기준은 왕도를 중심으로 구심점이 되어 왔었던 만큼 행정명칭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서남북 부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백제의 왕도라는 것이며, 오백년 가까이 사용한 행정 명칭으로 구분되었던 만큼 백제의 건국지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지명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광주시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중부에 속하였으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동부면과 서부면이라는 행정 명칭이 남아있었지만, 남부면과 북부면이 소멸되었던 것은 동부와 서부는 지속적으로 같은 행정 구역으로서 유지되어 왔지만 북부는 대부분 한강 건너이며 남부는 남한산 넘어쪽으로서 그 지역에 독립된 행정지명이 있을 때는 방향성이 있는 땅이름은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소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유한 땅이름이라면 고착될 수 있으나 행정명칭 이기에 지금까지 동부 서부 중부라는 행정구역이 전해져 왔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면이 크며 우리나라에서는 방향성이 있는 행정명칭으로서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으로 나타나는 지역은 이곳뿐이며 이러한 것과 유사한 땅이름이 백제인들이 진출하여 고대 국가를 세운 일본의 아스카지방에서도 일본지역 유일한 땅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백제의 통치 제도가 일본에 정착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하남시 덕풍천 주변에 동부 서부 북부라는 지명이 교차하는 중심으로서 왕궁지가 있었던 교산동 일대와 백제 근초고왕 때 한산으로 천도하였다는 남한산성이 중부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백제의 오방통치 제도와 관련된 땅이름의 중심지가 광주와 하남에 남아 있다는 것은 이곳이 중심권에 속하는 백제의 왕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한상준대표  gjilb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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