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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과 이성산성 일대의 역사성 연구(6)하남 교산동 건물지를 왜 백제의 왕궁지로 보는가?(5)

소규모의 집단이나 특정적인 위치에서는 단일 유물이나 유적을 기대 할 수 있으나 세력 형성에 적합한 곳에서는 중복성이 있으며 환경에 의존해서 살아 갈 수밖에 없기에 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는 지속적인

터전으로 이어져 왔었던 것으로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유적도 많다는 것이다.

다만 도시 구조상에서 어느 시대의 것이 전체적인 연결성과 더 우위에 있는가 하는 기반을 밝히는 것으로 주변과의 연계성 등 종합적인 연구 검토에서 윤곽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자 이성산성에서 나타나는 출토된 7가지 유적과 유물에 대하여 기본적인 개념을 우선 알아보기로 하겠다.

 

【2】 저수지(貯水池)

 

우리나라에는 산성의 국가라 할 만큼 많은 산성이 축조 되었으며, 남한에만 수 천개가 되는 것으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을 만큼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된 많은 산성에서는 작은 저수 시설이나 우물은 있어도 이성산성처럼 거대한 저수시설을 조성한 성은 몇 곳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저수지를 조성 할 때는 유사시에 집결하는 사람의 숫자에 걸맞게 저수지의 규모를 정하여 조성하는 것이다. 즉 오랫동안 항전 하면서 사용 할 수 있는 물의 양을 계산 하지 않으면 않되는 것으로 이성산에서 발견된 저수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1차 저수지 54m x 30m (약500평),

2차 저수지 26.6m x 16.4m (약130평)

c지구 저수지 20.7m x 15.6m (약97평)

위의 1차 저수지는 석축을 쌓지 않고 사용하다가 매립되어 그 자리에 2차 저수지를 조성한 것으로 시대가 앞선 것이다.

2차 저수지와 c지구 저수지는 나중까지 사용한 것으로 형태가 완벽하게 남아있는 것은 2차 저수지이며 c지구 저수지는 많이 파손된 상태에서 발굴 되었다.

위치적으로 c지구는 이성산 정상에서 가까운 곳으로 높은 위치에 물이 흐르는 샘 주변에 저수지가 조성된 것으로 규모가 작으며, 1,2차의 저수지는 이성산성 내부 계곡 제일 낮은 곳이며 성벽에 붙여서 축조한 것으로 물의 양이 제일 많은 위치이다.

 

# 저수지와 연못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

 

우선 저수지와 연못에 대한 구분을 제대로 해석 하지 않고는 이성산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자칫하면 혼돈 될 수 있기에 구분하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다.

저수지는 연못과 달리 유사시에 먹을 물과 전투에 사용 할 수 있도록 저장한 물로서 부패하거나 흐리게 되면 사용 할 수 없기에 관리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물을 해마다 청소하듯이 저수지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사용 할 수 없으며 저수지가 매립되었다는 것은 사용하지 않은 마지막 시기에 해당된다.

나무 등 쓰레기가 퇴적된 것은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폐기된 상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연못은 이와 달리 내부에 나무 등 부패물 이 어느 정도 퇴적되어도 연못으로는 지장이 없지만 저수지는 오랫동안 방치 할 수 없는 식수 저장시설이다.

【3】 8. 9. 12각 건물지 및 신앙유적(거북바위, 별자리바위)

 

이성산성에 밀집되어 있는 다각형 건물 성격에 대해서는 밝힌바 있으며, 내용을 요약하면 이성산에는 3개의 능선이 있는데 제일 높은 능선에는 9각이 있으며, 한단 낮은 능선에는 12각이, 제일 낮은 능선에는 거북 바위와 함께 별자리 바위가 능선에 줄지어 있다.

또한 9각과 가까운 같은 능선에는 8각이 있어 이러한 서열과 위치 분포 와 함께 상징성을 검토 연구한 바에 의하면 아래와 같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 8각(금성) 9각(태양) 12각(달) 거북바위(오리온 별자리)

 

이성산 능선은 높은 곳에서부터 해 달 별의 순서로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태양 옆에는 항상 따라 다니는 금성(샛별)이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을 재현 했었던 것이다.

자연숭배 신앙에서 제일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태양을 9각으로 표현 했었던 것은 크다는 의미에서 기본 숫자 중에서 제일 큰 9를 상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입증하는 문헌기록은 중국의 예제(禮制) 건설제도의 왕성에서 “9는 최고 등급의 대표수로 왕이 전용 하였다, 또한 왕성의 내실에는 9실(실) 9빈(빈) 밖은 9실(실) 9경(경) 나라 안의 직무를 9종으로 나누어 각각 9경으로 분담하여 사무를 본다.

또한 8각은 금성의 한 주기가 8년이라는 상징성에서 8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하늘에서 해 와 달 다음으로 밝은 것이 금성 이며 우리가 흔히 샛별 이라 하며, 삼국사기에는 태백성(太白星)으로 관측한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나며 자연 숭배 문화에서는 비중이 큰 신앙으로 추앙되었던 것이다.

9각 옆에 있는 8각은 태양 과 항상 같이 하는 금성과의 관계로서 이성산성에서도 함께 있으며 8각 금성은 왕을 보좌 하는 것으로 중국의 도성제도 이론에서는 [주례] 궁백(宮伯)에 “8차(次) 8사(舍)의 직무를 부여한다,

“궁백은 왕궁의 보위를 주관하는 인원의 관장(官長)이다”, 하늘의 법칙과 같이 지상의 왕궁도 동일하게 제도화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하늘과 같이 서열화 한 것으로 이성산에서도 제일 낮은 능선에 배치한 돌 거북 바위의 등에는 약16개의 구멍이 새겨진 것으로 구멍의 크기와 위치별의 밝기 등을 비교한 결과에 의하면 오리온 별자리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리온 별자리이 외 또 다른 별자리 바위도 3개 더 능선에 배치되어 있다. 오리온 별의 뜻은 서양에서는 무적의 사냥꾼으로 중국에서는 중앙에 있는 3개의 별을 거북이별로 지칭하였다.

또한 ‘에집트 피라미드’도 오리온 별자리와 같은 배치로 조성 했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고대인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 되어왔었던 별자리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보면 이성산성은 하늘의 중요한 숭배의 신앙지로 조성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위와 같은 다각형 건물지가 발견된 곳은 모두 백제 문화권으로서 일본에 백제인들이 쌓은 국지성(菊池城)의 2개의 8각지 공주의 12각지, 순천의 백제 검단산성에 12각지 등이 발견되었으므로 지금까지 백제 문화권에서만 고대 다각형 건물이 발견됨으로서 이성산성 역시 백제의 성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 용(龍)바위 및 백조 바위 등 각종 초기 신앙 유적

 

이성산성 내부에는 많은 신앙 유적이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그중에서 밝혀진 것으로 용 바위와 백조 바위이다.

이들 바위는 자세하게 어떤 감각을 갖지 않고는 아무런 뜻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극히 자연적인 것으로 최소한의 인공으로 조성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용바위는 이성산 정상의 동쪽편에 위치한 바위로서 초기의 기룡(奇龍)으로 보여지는 새의 머리와 같고 발과 꼬리를 형상화 한 흔적과 주위에는 8각으로 태를 두르듯 돌을 쌓은것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조성물은 많은 뜻을 함유하고 있기에 이성산의 성격을 밝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백조 바위는 9각지의 남쪽에 목이 긴 새를 형상화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곳 역시 자연석에 돌을 쌓아서 축조한 것으로 지금은 드물게 흔적만 남아 있는 현상이다.

이성산성 곳곳마다 원초적인 자연숭배 유적이 남아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많은 돌무더기가 왜 성벽 축조에 이용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었던 것이다.

성벽의 석재를 살펴보면 강에서 가져온 강돌과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은 석재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지척에 많은 석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두가지 측면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성벽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성벽의 돌을 가져와서 조형물을 조성하였다고 생각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것은 성벽 축조 당시에도 보호 되었던 것으로 모두 인위적인 뜻이 포함된 유적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산성 내부에 산재되어 있는 돌무더기나 석재 조형물의 성격을 규명하면 최소한 축성의 시대를 규명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산 내부에 무덤이 많다면 무덤을 조성한 시대는 성곽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을 사용하고 있을 시기에는 성안에 일반적인 무덤을 조성 할 수 없었을 것이며, 있었다 할지라도 유사시 석재는 무기로 사용되기 때문에 남아 있을 리가 없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축조 당시 처음부터 보호 조성되어 왔었던 유적으로 볼 수 있는 석재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고정된 큰 바위와 함께 조성한 돌무더기 신앙 유적이 도처에 산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것은 불교가 유입되기 전 백제시대의 자연숭배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으로 불교가 성행했었던 한성 말기의 고구려나 신라시대는 성을 쌓지 않았다는 단서가 되고 있다.

즉 산재되어 있는 석재와 조형물에서 이성산성의 사용 시기가 밝혀진 것이다.

한종섭<백제문화연구 회장/ 신지식인>
 

광주신문  gjilb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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