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왼쪽
오른쪽
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역사/탐방
남한산성 과 이성산성 일대의 역사성 연구(4)하남 교산동 건물지를 왜 백제의 왕궁지로 보는가?(3)

◆교산동 건물지는 한자리에 수 백년간 건축한 건물지로서 한산아래 도읍을 정하였다는 삼국사기 문헌 기록의 역사성과 유일하게 동일하다.

<왕궁지 판축>

지금까지 문헌 기록이나 보호시설 주변 유적 배치와 도시구조에서 백제의 왕도임이 밝혀졌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전문화재연구원(경기문화재단)에서 2년째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백제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부터 이러한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이성산성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유물은 내 놓지 않거나 기존의 잘못된 학설을 고수 하고자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하여 검토 연구해 보기로 하겠다.

교산동 건물지를 발굴한 결과에 의하면 와편이 엄청난 양으로 축적되어 발굴되고 있고 다듬지 않은 거대한 초석이 겹겹히 층위를 이루고 있기에 이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고대 기와를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은 왕궁이나 관부 사찰과 같은 종교용 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일반적인 건물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구분된다.

교산동 건물지는 사찰이 아니라는 것이 확고히 입증되었고, 그 이유는 건물의 구조와 발굴되는 여러 가지 현황에서 주 건물은 사찰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일반적인 관청으로 이용하였다는 건물로 본다고 하여도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관용 건물로서 이렇게 방대한 규모는 없으며, 우선 건물의 구조와 규모 또한 오랜 세월 한자리에 지속적으로 건축된 특성에서 왕궁이외는 달리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대의 건물은 신분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규모라면 더 이상 달리 생각 할 수 없는 것으로 궁궐이라 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또한 여러 층의 초석이 중첩(현재 9층위 초석)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옮길 수 없는 권력자가 사용한 건물이라는 것이며, 만약 고려나 조선 시대에 이렇게 장구한 세월에 거대한 건물이 한자리에 있었다면 분명히 기록에 남아 있는 건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세밀히 생각해야 할 것은 제일 윗층에 거대한 규모의 건물 초석이 맨 윗층에 있다는 것은 그 아래층의 건물도 이와 연계된 세력으로 이어진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맨 윗층에 있는 건물의 초석 배치가 건물지와 맞지 않거나 작은 규모라면 달리 생각할 수 있으나 남쪽편에 있는 거대한 초석의 큰 규모의 건물은 맨 아래층과 연결된 세력권의 건물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쪽 편에는 여러 시대에 걸처서 집터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 지는 다듬은 초석과 건물지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초석 배치등 조선시대의 백자 출토에서 백제시대 이후에도 건물지로 이용된 흔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왕궁지 남쪽 성벽>

그렇다면 지금까지 백제시대의 유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종대의 남쪽편 시굴조사에서 백제시대의 초기에 해당되는 연질의 토기편이 깔려 있었으며 특히 흑도가 많은 것을 목격하였다.

또한 연질의 토기편 유물이 많은 것은 백제가 처음부터 이곳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경기문화재단 소속의 기전매장문화연구원 발굴의 문제점은 유물을 볼 수 있도록한 층위 발굴은 하지 않고 돌과 흙만 보이도록 하여 유물을 볼 수 없도록 치워버리고 공개하고 투명성 없는 발굴을 함으로서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도록 하면서 유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발굴은 유물이 흙의 층위에 박혀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시대를 구분하는 만큼 유물을 깨끗이 청소한 발굴은 문제가 있는 발굴이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백제 초기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고 공주로 천도 할 때 까지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면으로 밝혀지고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백제 초기에 해당되는 유물이 교산동 건물지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또한 유물을 판독 못하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교산동 건물지를 처음부터 백제의 도읍지로 보거나 찾아 낼 수 없는 것이다.

[2] 건물의 구조와 규모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느 건물지와 비교 할 수 없는 구조의 특수건물이라는 것이다.(사찰이나 일반적인 관부의 건물이 아니라는 것으로 궁궐 이외는 달리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3] 고대의 건물에서 기와를 올 릴 수 있는 건물은 궁궐과 관부 종교 건물 이외는 기와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한정되어 있고 종교와 관부의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 구조와 규모에서 입증됨으로서 왕궁임을 알 수 있다.

[4] 초석이 현재까지 9층위로 겹쳐져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한자리에 여러 번 건물을 건립한 것으로 쉽게 옮길 수 없는 건물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역사성이 있는 건물이다.

[5] 위와 같은 건물과 관련된 기록은 오직 삼국사기에 한산아래 도읍을 정하였다는 백제의 왕성 밖에 없다는 것이다.

[6] 교산동 건물지 기전의 발굴은 유물을 볼 수 없도록 발굴을 하며 발굴까지도 비공개 투명성 없는 발굴을 함으로서 백제의 유물이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유물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발굴의 기본을 무시한 것이며 유물 층위를 확인 할 수 있는 발굴은 하지 않고 누구도 알수 없도록 하는 발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7] 교산동 건물지의 남쪽편 상부에 남아있는 초석은 규모가 크고 교란이 되지 않은 거대한 건물지는 백제 시대의 건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동편에는 불규칙한 초석 규격과 작은 규모의 건물등 교란이 심한 것으로 조선시대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위와 같은 몇 가지의 요소에서도 백제시대 오랜 세월 왕궁으로 사용한 것이 교산동 건물지라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한종섭<백제문화연구 회장/ 신지식인>

 

 

광주신문  gjilbo2001@hanmail.net

<저작권자 © 파인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주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