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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도에서 본 한강 권 유적한강권 문화재와 지금까지 제기 되어온 학설의 방향

 

제16회 신지식인, 한 종 섭 글

 

1. 한강권 문화재와 지금까지 제기 되어온 학설의 방향

2. 이성산성의 특성과 한강 권 유적

3. 남한산성과 아차산 보루성 재점검

4. 아차산 일대는 삼한과 삼국초기 또는 백제의 유적은 없는 곳인가

5. 한강권 유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전환

 

1. 한강권 문화재와 지금까지 제기 되어온 학설의 방향

최근 공주 부여의 대 백제전과 백제문화 복원에 수 천억원을 투입하여 행사를 진행하여 왔었다.

그러나 공주는 63년 부여는 122년으로 모두 185년간으로 백제의 전 기간 678년의 3분지 1도 되지 않는 백제 말기의 기간이다.

백제의 강성한 493년간의 실체는 방치되고 있는 현실로서 우리 역사 문화의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본 논제는 지금까지 한강권 문화재와 관련된 인식의 문제점을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백제 5백년과 관련된 장구한 역사문화는 그 어느 역사 보다 우리 민족의 긍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강권 역사 문화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곳보다 장기간 발굴한 하남시 이성산성을 비롯한 남한산 일대가 시금석이 되고 있다.

남한산 일대는 그 어느 곳보다 유적의 밀집도가 높은 곳에 속하는 유적이다.

또한 발굴과 관련된 잡음이 많았던 곳으로 혼란과 올바른 판독과 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되었다.

남한산 일대의 유적은 우리민족에게는 긍지와 부가가치가 높은 문화 자원이기에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이 시대 얼마나 소신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가 생각하게 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이나 하남시 일대를 신라나 고구려의 유적으로만 단정을 지을 수 밖에 없고 다른 한강권 500년의 백제나 그 이전의 유적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일반인 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진지하게 공개토론을 한 적이 없을 만큼 일방적인 발표만을 진행하여 왔던 구조적인 발굴의 문제점도 포함되어 있다.

언제나 발굴은 발굴자에게 유리한 학설로 결론짓는 현상에서 진지한 공개 토론과 비판받기를 두려워하기에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다.

현 학설에서는 삼한시대나 삼국초기는 원삼국시대로 축소한 현실에서 왜소하게 은폐 할 수밖에 없고, 특히 백제와 관련된 것은 지금까지 규모가 작은 몽촌,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주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학의 뿌리는 왜정시대 식민 사학자 들이 심어놓은 학설이 계속 확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정시대의 관료나 지배층의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이 교체가 되지만 논문으로 내려오는 학설은 전혀 변화가 될 수 없는 것은 식민사학자들이 인정해야 만이 역사학의 논문이 통과되기 때문이다.

축소해 놓은 역사로 인하여 삼국 초기나 그 이전의 역사 유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식민사학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설의 바탕에서 남한산성이나 하남시 이성산성의 유적도 당연히 고구려나 신라의 유적으로 발굴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작은 관심만 가져도 어느 시대 어떤 성격의 유적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우선 이성산성을 논하기로 한다면, 어느 때 어느 나라가 조성한 유적인가를 숨길 수 없이 탄로가 나는 것은, 쉽게 구분 할 수 있는 단순한 내용들 까지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산성 발굴에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이 시대는 역사유적에 대한 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둔한 사람들과 민족사를 왜곡하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었다는 지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도 진지한 토론과 분석으로 이성산성의 성격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학에는 진지한 토론문화가 실종 된지 오래고 특히 잘못된 것에 대하여 채찍질을 할 줄 알아야 함에도 그러한 면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면에는 계열화된 학맥과 식민사관의 학설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터놓고 학문적인 양심으로 토론을 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성산성을 보는 시각은 무엇이며 또한 이와 관련된 가까운 한강권 유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성산성 하나만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주변 환경이 왜곡되어 있음을 알고 있어야 만이 이성산성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

이성산성을 비롯한 남한산 일대를 오랫동안 발굴하였음에도 백제와 관련된 유적을 왜 숨기고 오랫동안 은폐 할 수밖에 없는가를 우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차분히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잘못 진행 되었는가 되돌아보면 오랜 세월 식민사학의 수렁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어 그 심각함이 표출된 대표적인 유적이 이성산성이다.

지금까지 반세기 분단된 국가의 문제점은 항상 막혀 있는 북방에 대한 우월적인 시각으로 고구려를 동경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와 더불어 치우친 시각에서 한강권 문화를 왜곡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것을 입증하는 예로서 우리가 중국과 교류하기 전에는 중국의 한방 의술이 발달 하였을 것이라고 신비함으로 동경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교류가 자유롭게 되자 새로운 의술을 배우고자 진출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로는 몇 가지 이외는 우월하거나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한강권의 역사는 식민사학의 학설과 함께 고구려에 대한 우월적인 바람이 한강권에 거세게 몰아 쳤던 것이다.

신라에 대한 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영남 쪽에서 장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역사 관련자 들은 비교적 분쟁이 적은 고구려 역사

 

연구로 많은 사람들이 치우치면서 왜곡이 도를 넘게 되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아차산의 보루성과 그 이외 한강권에 잘 쌓은 석성이 있으면 모두 고구려식 축성이라 하여 답사 코스로 정할 만큼 고구려에 대한 동경심이 강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에서 이성산성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이성산성을 고구려나 신라의 성이라고 하여도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힘의 논리가 난무하여 학문의 진리를 왜곡하게 된 현상이다.

이와 더불어 남한산성 까지 신라의 유적이라고 왜곡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 잘못 끼워진 첫 단추로 인하여 전채를 왜곡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남한산성의 왜곡의 근원은 하남시 유적에서부터 시작된 만큼 남한산성의 왜곡은 하남시에서 거대한 고대도시가 발굴되어도 이를 왜곡해야 하는 연장선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즉 바늘 도둑이 소도둑으로 점점 확대되어간 현실로 변화가 된 것이다.

우선 이성산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백제시대의 성이라는 단편적인 짧은 말이 흘러나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결론은 신라시대나 고구려가 쌓은 성이라고 발굴에 의하여 종결을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반 사람들은 한강권에는 삼국이 각축전을 전개 하였던 만큼 삼국이 번갈아 가면서 있었기에 이성산성 또한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대략 결론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시각은 고구려와 신라가 이성산성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적당히 받아들이게 된 공통적인 시각과 함께 유물까지 같은 방향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역사 왜곡은 유물까지 왜곡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삼한시대나 백제초기의 유물은 원삼국이나 삼국시대로 적당히 이름 붙일 수밖에 없다.

또한 하남시가 백제 왕도라는 문제를 제기 하기 전에는 한강권에 있는 모든 석성(石城)들은 신라나 고구려가 쌓은 성이라고 알려질 만큼 왜곡되어 있었고 심지어 백제는 석성을 쌓을 줄 모르고 토성을 쌓는 기술 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삼국이전에 현대인들도 난해한 한문을 사용할 만큼 발달하였음에도 돌 위에 돌을 쌓는 기술이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무지함을 들어내 놓고 있다.

예로서 이천의 설봉산성은 잘 쌓은 석성으로 고구려 문화 연구회에서는 고구려 성이라고 답사코스로 정할 만큼 고구려가 쌓은 것으로 잘 알려진 성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주장은 축성방법이 고구려식이라고 말하면서 다양한 논리를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왜 고구려만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고 백제나 신라에서는 왜 할 수 없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구분보다, 막연하게 주장만 하는 오류가 지배하는 풍토가 된 학문이 되고 말았다.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계양산성도 잘 쌓은 석성으로 고구려 성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 왔고 심지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서울 강서구의 궁산 고성지도 고구려 성으로 전해져 왔던 석성이다.

그야말로 한강권의 잘 쌓은 석성은 고구려나 신라의 성으로 백제와 관련된 성은 토성만이 있는 것으로 알려질 만큼 편협 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작은 규모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한강권 백제의 대표적인 성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석성을 쌓는 기술을 두고 국가 간에 모방 할 수 없는 고도화 된 기술인양 고구려만이 석성을 잘 쌓고 백제는 낙후되어 있는 것으로 결론을 짓기도 하였다.

심지어 왜 삼국의 성이 제각기 다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어도 구분하는가 하면 어리짐작으로 성에 대한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이 등장하여 고구려식이라고 언론을 통하여 단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진지한 토론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학문의 병폐로 서 오랫동안 전문가로 자처하고 있다.

하나의 예로서 삼국의 고도화된 기술자들이 교류한 예로서 신라의 황룡사 목탑도 백제국에 정식 초청한 아비지라는 장인이 건립한 것이다. 목탑을 건립한 이후에 적대국인 신라에 아비지가 목탑을 건립한 것을 후회를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얼마나 인적 교류가 많았는가를 알 수 있다.

삼국의 문화 중에서 백제가 제일 앞서 있음에도 석성을 잘 쌓을 줄 모르는 편협 된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역사를 보는 안목이 심도 있게 보지 않고 얼마나 즉흥적인 가를 알 수 있다.

다행이 최근 발굴에 의하여 속속들이 백제의 성들로 밝혀지고 있으며, 이와 함께 워커힐 내부에 있는 아차산성도 한때는 고구려나 신라의 성이라고 발굴을 해 놓고도 주장 했을 만큼 한강권 500년 역사는 인식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시각은 지금도 재현하기 어려운 이성산성을 고구려나 신라의 변방유적이라고 주장하므로 서 병폐의 심각성이 들어나고 있다.

이성산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이성산성의 유적을 연구하여 지금까지 일본이 주장한 전방후원분이 백제에서 발생한 금성(金星)과 관련된 고분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이성산성의 유적들은 동양에서 지금까지 밝히지 못하였던 역사의 수수께끼를 밝혀줄 수 있는 실증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무엇보다 크다는 것이다.

이성산성을 발굴자 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민족사가 오랫동안 얼마나 잘못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한강권 이성산성 뿐만 아니라 영산강 지역에는『삼국사기』의 기록까지 무시하고 백제초기 온조왕때 멸망한 마한이 5세기 까지 있었다는 내용을 정설처럼 과장하므로 서 백제는 보잘것없이 400년이나 깎아내리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일본에서 말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고분이 일본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 한일 양국 간의 정설로 받아들여 인정되면서 심각성이 도를 넘게 되었다.

전방후원분을 일본에서 발생한 문화로 국내에서도 동의하면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을 마한 묘제의 증거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일본에서 백제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면서, 백제문화를 깎아 내리는데 일조를 하게 된 식민사학의 병폐가 고착된 현상이다.

삼국의 문화 중에 유독 백제사만이 축소하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었고 또한 누구도 강하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면에는 중국의 사서에 나타나는 백제를 마한 사람으로 기록한 내용을 증거로 차용하여 삼국사기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의 전신이 마한이기에 한동안 중국사서에는 백제를 마한으로 기록하는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통신이 발달한 외국에서 조선도 아닌 600년전의 고려(KOREA) 국으로 명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 천년이 지나면 외국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고려시대의 코리어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한강권 전채가 열악한 왜곡의 역사 환경에서 거대한 백제의 왕도가 하남시에서 발견되므로 서 이를 적극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구축한 식민사학 학설의 핵심적인 아성 전채가 무너지기에 하남시 백제 왕도를 발굴까지 하면서도 왜곡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이러한 것이 용납되는 우리의 현실로서 학계는 물론 관, 언, 정 모두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학문에 대해서는 아무리 잘못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는 폐단의 비도덕적인 선례를 남기고 있다.

우리 선조의 찬란한 역사까지 왜곡하는 후손들이 있고 또한 이에 동조 한다는 점에서 일반인 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다른 나라에서 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일본인 학자는 일본에서 이렇게 거대한 유적이 발굴되었다면 연일 대서특필로 언론에 보도 되었을 것인데 거대한 유적을 삼년간 발굴하면서 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하여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또한 떳떳한 발굴이라면 숨길 이유가 없다.

황룡사 목탑지 보다 더 큰 목탑이 하남시에서 2기나 발굴되었고,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건물지로서 최대 규모의 건물을 3년간 발굴하면서 숨겨 왔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에 동조하는 현상에서 얼마나 자신이 몸담아 살고 있는 이 땅을 포기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성산성의 특성과 한강 권 유적

이성산성을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하는 것은 화강암 석재를 옥수수 알처럼 둥글게 다듬은 성 돌과 기울기의 경사가 60도나 되는 성벽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유일한 석성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동양의 성들을 조사한 외국인 학자들도 이러한 성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본적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여러 면으로 입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성산성을 백제가 쌓은 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고 보면 얼마나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어느 나라가 축조하였는가 하는 문제보다 이성산성이 어떤 구조로 축조 되었는가 하는 근본부터 알고 있어야 만이 어느 나라가 쌓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성산성의 석성은 돌을 조각품처럼 표면을 둥글게 다듬어 쌓은 성으로 지금도 이러한 성을 단 100m 정도라도 재현을 하려고 하여도 엄청난 비용 때문에 재현조차 어려울 만큼 공력이 많이 든 고급적인 석성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이성산성 전채를 이렇게 축조한다는 것은 삼국시대는 한나라의 국력을 집중하지 않고는 쌓을 수 없는 축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화강암은 이성산성과 가까운 남한산 일대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는 석재로서 한강 건너에서 이성산성까지 운반해 오는 과정만 하여도 쉽게 생각 할 수 없고, 신라나 고구려의 변방에서 장기간 이러한 성을 쌓았다면 그들의 왕도에는 이보다 더 고급적인 성이 흔하게 발견되어야 하지만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사한 성이 발견된 예가 없다.

지금까지 고구려나 신라의 성이라고 주장을 한다는 것은, 63빌딩을 시골에 건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무모함을 들어내 놓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생각으로는 건립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을 우둔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는 신라나 고구려의 성이라고 할 수 없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은 삼국의 문화를 평하기를 신라는 드라마틱하고, 고구려는 고딕식하고 백제는 낭만적이라 하였다.

문화적인 감각에서도 이성산성의 성벽은 곡선의 낭만적인 감각을 풍기고 있으며, 고구려의 모나고 직선적인 고딕식과 거리가 멀고 요란스러운 신라의 드라마틱 문화와도 미적으로 차이가 있다.

삼국 문화의 특성에서도 백제가 얼마나 낭만적인 가를 알 수 있는 것은 토기에서도 몸체가 둥근 것이 많은 것으로 곡선을 잘 표현하고 있기에 보다 포근함이 있는 낭만적인 표현이다.

이성산성은 엄청난 공력과 정성을 들인 것으로, 그 당시 경제적인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성을 축조하는 우매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단순한 생각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고구려나 신라의 축성으로 주장한다는 것은 민족사를 왜곡하기위한 의도적인 뜻이 있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성산성이 신라나 고구려의 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이유에서도 알 수 있다.

 

1) 이성산성 내부에서 발굴된 유적 중에 국내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부여족 묘제양식이 발굴되어 백제를 건국한 부여족이라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한 백제유적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성산성에서 부여족 고분이 발굴되므로 서 백제 왕도의 제사 처임이 밝혀진 것이다.

2) 이성산성 내부에 8각 9각 12각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고 격이 높은 신전 건물로서 다른 그 어느 지역에서도 이렇게 밀집된 유적과 2개의 9각 건물지는 발견된 적이 없다.

다각형 건물과 옥수수 알 모양의 석성은 같은 시대 마지막 까지 남아 있었던 시설로서 백제왕도 신전 건물 이후는 이성산성을 다른 나라가 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부 건물구조에서 밝혀지고 있다.

다각형 건물과 성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성이 있는 고급적인 문화의 시설로서 그 어느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은 왕도와 관련된 격이 높은 시설임을 알 수 있다.

3) 고구려나 신라가 한강권에 주둔한 시기는 불교가 성행하던 시대로서 이성산성에 사찰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별자리나 거북바위, 전방후원분과 같은 토착적인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백제시대의 유적임을 알 수 있다.

4) 이성산성의 위치가 한강변을 지키는 성으로 특히 북쪽의 고구려쪽을 감시하는 성이라는 점에서 위치적으로 고구려 변방의 성이 될 수 없는 고급적인 축성이다.

5) 이성산성은 조각품처럼 잘 쌓은 석성이자 각도가 60도로서 지금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특수한 축성법으로 문화와 경제가 앞선 지역에서만 축성 할 수 있는 성이다.

6) 이성산성의 성벽은 여러번 쌓은 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내부의 건물지는 중첩되어 있지 않고, 초석 또한 모두 다듬지 않은 것이다.

교산동 왕궁지는 9번이나 초석이 중첩되어 있으나, 이성산성 내부의 건물지는 초석이 중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처음 건립한 건물이 폐성이 될 때 까지 장기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전 건물은 다른 건물과 달리 변화가 적고 또한 초석이 중첩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고구려나 신라가 이성산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모양이 변하지 않는 신전 건물임을 밝히고 있다.

7) 이성산성의 석성은 화강암으로 남한산 일대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는 석재로서 한강 건너에서 운반해온 석재라는 점에서 고구려나 신라의 변방에서는 축성하기 어려운 노력과 공력이 드는 성이다.

8) 이성산성 내부에는 그 어느 곳보다 신라 시대의 골호(骨壺)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어 신라 시대는 이성산성이 폐허가 되어 무덤으로 이용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9) 가까운 하사창동에는 천왕사라는 명문이 발굴된 곳에 황룡사 목탑보다 더 큰 목탑지가 발굴되었고, 교산동에서는 목조 단일 건물지로서는 최대의 건물지가 발굴되어 모두 백제왕도 유적으로 이성산성 유적과 연계가 되므로 서 백제 이후에는 집중적이고 거대한 세력권을 이곳에는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10) 『삼국사기』문헌 기록과 동일한 이성산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의 중 도림의 꾀에 넘어가 과도한 축성과 토목공사로 인하여 국력을 탕진하여 멸망하게 되었다는 내용과 같다.

개로왕때 과도한 왕도의 축성으로 인하여 국력을 탕진하게 되자 고구려가 이를 기회로 한성을 침공하여 멸망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입증하는 이성산성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입증하는 유물로서 이성산성에서 돌을 가공한 정(釘)자국이 녹 쓸지 않은 성돌을 발견하여 보관한 적이 있으며 이는 성을 쌓고 바로 무너졌었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었다.

 

상기 이외에도 백제시대의 성이라는 것을 여러 면으로 밝혀지고 있으며, 특히 위의 중요한 10가지는 백제 이외는 또 다른 세력이 점거하여 축성하거나 건물을 세운 적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어 고구려나 신라가 축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나 신라와 관련된 성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변방 산골에 세계에서도 없는 유일한 고급 성을 고구려나 신라가 쌓았다고 주장하는 말이 된다.

이성산성과 같은 조각품과 같은 성을 쉽게 생각하는 발상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인 성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이 들기에 장기적이고 안정된 세력권이 아니면 축성할 수 없는 성으로 왕도가 아니면 축성이 어려운 성이다.

군복무를 전방에서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휴전 상태인 지금의 전방에서도 작전상 부대 이동을 자주 하는 것은 일종의 훈련을 겸하는 부대 이동을 하고 있다.

전방 부대는 그 만큼 수시로 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만큼 적의 침입통로가 불확실하고 군사적인 훈련 차원에서도 부대 이동을 수시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삼국의 각축전이 심했던 한강권의 석성을 두고 고구려나 신라의 성이라고 쉽게 주장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강권 500년 백제 왕도를 배제하거나 축소한 식민 사관에서 나온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이성산성은 어떤 성격의 성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백제의 성을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막연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발굴에서 오랫동안 주장을 하였기에 설마 잘못 주장을 할 수 있을 까 상상하기 어려운 황당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산성을 백제의 성이라고 한사람만이 계속 주장하여 왔었기에 얼마나 우리의 시각이 고구려나 신라로 치우쳐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단 한사람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논리성이 있고 내용을 깊이 알고, 정확한 근거를 내세워 주장하고 있다면 논리성이 없는 단편적인 주장은 신뢰 할 수 없게 된다.

이성산성을 심층적으로 논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우리의 역사가 식민사관에 깊게 물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 표본이 이성산성이다.

특히 백제사는 일본과 관련성이 많기에 한강권 백제의 유적은 철저히 고구려와 신라의 유적으로 거리낌 없이 왜곡 포장되어 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강유적에 대한 백제의 관념은 미약한 상태에서 고구려와 신라라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기에 전환하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

최근 일부에서는 남한에는 고구려다운 성이 없다는 말이 흘러나올 만큼 어느 정도 변화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

 

3. 남한산성과 아차산 보루성 왜곡

한강권에 고구려나 신라의 유적으로 지금까지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였던 남한산성이나 아차산성을 왜곡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에 놓여 있다.

잘못된 시각들이 모든 유적들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최대의 기와장이 발견된 남한산성을 두고 신라의 병기 창고라고 버젓하게 언론 보도를 통하여 방영을 하기도 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남한산성 석성의 성벽도 화강암으로 남한산 일대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는 석재로서 고구려나 신라는 물론 조선시대 역시 축성하지 않은 화강암 구간의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포차가 발달하여 삼국시대보다 오히려 축성이 정교하지 못하였고, 한강 건너에서 화강암을 운반하여 축성을 하였다면 오랜 기간의 대 역사의 축성인 만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남게 된다.

조선시대 쌓았다는 기록의 축성구간은 화강암이 아닌 남한산 일대에서 채석한 편마암으로 충분히 구분이 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대형 건물지를 무기고라고 언론을 통하여 왜곡하는 것은 군사적인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으로 칼과 창과 같은 무기는 긴급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분산 휴대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지금까지 왕궁규모의 무기고는 유래가 없고 기와 한 장의 무게가 20kg 정도 되는 것은 신라 왕궁에서도 발견된 예가 없음에도 주장한다는 것부터 논할 가치가 없는 우리의 발굴 현실이 되고 있다.

고대 건물은 신분에 따라 크기와 사용하는 자재를 규제하고 있다는 상식까지 외면한 발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현상에 어이가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역사의 판단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도 신분에 따라 건물의 규모를 통제 하였는데 하물며 삼국시대 무기고를 왕궁 규모로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이성산성이 고구려나 신라가 축성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경제와 신분에 대한 고급적인 시설임에도 용도와 맞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제일 규모가 큰 기와가 발견되었다면 이는 격이 높은 왕궁 건물이며, 남한산성을 백제왕도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하남시 백제 왕도를 왜곡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대형 기와와 함께 물이 베어나는 연질 기와가 많고 대형기와 역시 연질로서 모두 상한선이 4세기를 넘기 어려운 유물임에도 신라시대로 왜곡하여 왔던 것이다.

식민사학에서 철저하게 연대를 숨기는 것은 토기나 기와의 연질과 경질에 대한 시대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은 왜곡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연질과 경질은 엄청난 과학 발달의 차이로서 용도 또한 획기적인 것으로 시대구분에서 절대적임 에도 지금까지 모호하게 거론하지 못하고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연질과 경질의 차이가 나는 시기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유물 역시 명확한 시대 설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남한산성에서 그 많은 백제의 유물이 발굴되어도 이를 은폐하여 왔던 점에서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다.

학술적인 유적을 부정하기 쉬운 것은 유물과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누구도 이를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엇보다 거대한 백제의 왕도까지 발굴을 하고도 은폐하는 현실에서 다른 것은 더 이상 거론조차 할 수 없는 심각함을 들어내 놓고 있다.

남한산성 내부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지는 근초고왕때 한산으로 천도한 왕궁의 건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여러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

다음 기회에 입증하는 더 많은 증거의 유물로 진실을 밝히기로 하면서 본문에서는 더 심각한 아차산 유적을 다루기로 한다.

 

4. 아차산 일대는 삼한과 삼국초기 또는 백제의 유적은 없는 가

아차산 유적이 어떤 성격의 유적인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남시의 유적들이 모두 신라나 고구려 심지어 고려시대 유적으로만 발표를 해왔던 문제점에서 다른 주변 유적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하남시에는 백제의 유물이 한점도 발견된 적이 없다고 발언한 사람이 계속 남한산성을 발굴하였던 만큼 우리의 현주소를 잘 알 수 있는 발굴이 되고 있다.

이성산성을 이해 하고자 한다면 가까운 유적들을 먼저 알지 않으면 혼란이 오며, 유적은 연계성이 있기 때문에 관련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아차산의 수많은 보루성 들은 어느 나라가 쌓은 유적일까 지금까지 아차산 보루성이라면 고구려와 관련된 성이라고 알고 있다.

구리시에서 광계토대왕의 동상까지 세우고 요란하게 고구려 유적으로 거리 홍보를 하고 있으며 언론으로도 고구려 유적으로 오랫동안 발표한 유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치밀한 검토와 토론이 없었고 또한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일방적으로 밀어 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차산 보루성을 고구려 유적이라고 희대의 해프닝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성이라고 할 수 없는 식민사학의 학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차산 보루성 유적을 식민사학의 위치에서는 고구려 이외의 다른 나라의 유적이라 할지라도 바른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신라의 유적이라고 하기엔 방향이 맞지 않고, 또한 삼국초기의 백제나 낙랑, 말갈의 유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삼국초기를 인정하지 않는 학설과 인식에서 제외되어 있는 학설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식민사학에서는 아차산 보루성을 고구려 이외는 달리 표현을 할 수 없기에 고구려가 한강권에 진출한 5세기 또는 6세기의 보루성과 관련된 유물이라고 왜곡하는 것 이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나 5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앞선 시대의 유물을 두고 고구려 유물이라고 하므로 서 쉽게 탄로가 날 수 밖에 없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물의 시대 설정도 왜곡을 하지 않으면 탄로가 나기 때문에 역사 왜곡과 함께 유물 왜곡도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시대 설정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단순한 유물 중에 연질과 경질의 토기 구분이다.

연질과 결질의 토기 구분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대를 어느 정도 구분해 놓으면 지금까지 왜곡한 내용들이 탄로가 나기 때문이다.

경질과 연질 토기나 와편의 시대 구분을 하지 않고 모호하게 하거나 무시하면 역사 왜곡을 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질 토기나 와편을 6세기의 유물이라고 할 수도 있고 수백년 동안 자유자재로 시대 설정을 하므로 서 역사 왜곡이 가능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설득력이 약한 애매모호한 토기 형태를 기준으로 주장을 하여 발굴자의 주관대로 시대를 설정하는 왜곡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연질 토기가 모두 출토되는 아차산 보루성 유적을 6세기의 고구려 시대로 설정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적을 왜곡하는 현상이 쉽게 일어나고 있다.

연질 토기와 경질 토기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로서 지금의 첨단 컴퓨터 보다 더 요긴하고 절실한 생활 도구로서 경질의 출현으로 연질 토기를 오랫동안 사용하기 어렵다.

연질 토기만을 사용하거나 경질 토기만을 사용한 유물만이 출토된다면 시대구분은 명확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예로서 가야 시대(〜 562년 멸망)의 토기는 대부분 쇠 소리가 날 만큼 경질로서 이와 비교를 한다면, 1000도가 넘는 온도의 철기를 제조 하면서 경질 토기는 자연스럽게 얼마지 않아 생산 할 수 있는 기술 구조이다.

그러므로 연질 토기만이 출토되는 아차산 보루성 들을 6세기의 고구려 성이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왜곡의 도를 넘고 있다.

또한 역사를 깊이 모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남쪽에는 백제가 있었으니 그 반대편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하면 무난하게 받아 들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제왕도 앞에 수많은 보루성을 쌓고 오랫동안 있다든가, 백제의 왕도가 공주로 천도하였을 당시에 천혜의 한강 경계선을 두고 수락산이나 불암산에 보루성을 쌓고 고구려가 오랫동안 주둔하였다는 것도 불합리 한 위치선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나라의 발굴은 발굴자가 자신의 학설에 맞추어 아무리 오판을 하여도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상충된 토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민족사를 왜곡한 것이 탄로가 나기 때문에 유물의 시대까지도 애매하게 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를 들면 거북선 총통 위조 사건으로, 가짜를 만들어 바다 속에 넣은 지 얼마 후에 부식되지 않고 생생한 것을 꺼내어 400년 동안 바다 속에 있었던 유물이라고 하여도 누구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부식이 되지 않고 글자까지 완연한 총통을 임진왜란 때의 유물이라고 국보지정 까지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위조된 내막을 알고 있는 어부의 고발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 탄로가 나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감정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유물까지도 역사학계에서는 누구 한사람 강하게 주장을 하지 못하였다.

또한 아무리 조작을 하여도 어느 누구도 문제를 삼지 않는 다는 풍토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범행을 시도한 것이다.

심지어 학문적인 것은 더욱 말 할 수 없이 왜곡이 심하고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것은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밝히는 데는 종합적인 사고와 논리로서 규명하여야 함에도 학문이 힘에 의해서 좌우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읽고 조금만 검토를 해보면 아차산 보루성들은 고구려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가 한강권에 백제를 치고자 내려온 병력의 규모는 대병력으로 일시에 침공을 하였다는 기록이며, 아차산은 백제의 왕도 문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발상이 되고 있다.

고대전은 대규모로 침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백제의 왕도 앞이거나 아니면 공주로 천도한 백제라 할지라도 군사는 보급이 수급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으므로 보루성을 고구려 군사유적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백제 왕도를 함락한 후에 신라로부터 구원병 일만명을 얻어서 돌아온 백제의 문주왕이 한성지역에 도달하자 고구려는 이미 물러나고 없었다.

한성이 파괴되어 도읍을 정할 수 없어 공주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는 기록에서도 고구려는 영토 보다 정복전쟁을 우선으로 대규모 침공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아차산은 백제왕도 앞이기에 백제시대나 그 이후에도 보루성과 같은 단 몇 십명이 오랫동안 성을 축조하여 고구려가 주둔 할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백제가 한강권에 있을 때는 왕도의 문전이고 백제가 공주로 천도 하였을 시에는 보루성을 많이 축조할 이유가 없는 위치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왕도 앞에서 충돌하는 시기는 강성한 시기의 5세기 말로서 보루성을 축조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시기는 아니다.

특히 집수정과 온돌을 놓고 백제의 왕도 앞에 소규모 병력으로 지탱 할 수 있다고 보는 자체가 문제의 발상이 되고 있다.

고대의 군사 활동은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은 백제의 왕도 문전에 소규모 병력이 오랫동안 있을 수 없는 것은 보급물자 수급과 군사 지원 등에서 장기간 기거 할 수 없다.

소규모 병력이 투입되는 위치는 소규모 국가 시대이거나 변방에서만 있을 수 있는 군사 활동이다.

또한 백제가 한성 지역에서 공주로 천도를 했을 무렵에는 고구려가 아차산에 보루성을 여러곳에 쌓고 주둔할 이유가 없다.

고구려와 같은 큰 규모의 국가는 적을 막기에 적합한 한강을 두고 아차산이나 수락산에 주둔 한다는 것은 위치상 적합하지 않는 위치다.

아차산 보루성 들이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성들이라는 것에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아차산과 연결된 용마산, 불암산, 수락산 일대에는 20여개가 넘는 보루성들이 지금까지 발견되었고 앞으로 정밀 조사를 하게 된다면 이보다 더 많은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최근 구리시와 인접한 남양주 일대를 조사한 결과 보루성과 수많은 성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러한 성들은 북쪽을 막아내기 위한 차단성으로 백제의 성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남양주에서 조사된 유적은 아래와 같다.

 

<최근 찾아낸 유적>

(1) 진관리 토성, (2) 퇴계원 토성, (3) 뱅이 토성, (4) 천겸산성, (5) 내각리 토성, (6) 선돌산성, (7) 진벌리 토성, (8) 철마산성, (9) 천마 산성 및 송라산성, (10) 월문리 내치성 및 차단성, (11) 문안산 토성, (12) 예봉산 조동성

 

<이전에 조사된 성>

(1) 봉화산 보루성, (2) 안산 보루성, (3) 도곡리 토성, (4) 역촌토성

(5) 예봉산 보루성, (6) 마현보루성, (7) 용진 토성, (8) 진중리 토성

 

남양주 일대를 세밀하게 조사를 하게 되면 위의 성들보다 더 많이 발견될 것으로 보여 지는 곳이다.

특히 천마산성은 둘레가 약 13km 정도이며 면적은 여의도 약 1.2배나 되는 성으로 한강 유역에서는 규모가 제일 큰 성이 발견된 것이다.

백제 왕도와 제일 가까운 문전이기에 당연이 이러한 규모의 성들이 발견되어야 하며 이러한 성들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남양주 일대의 수많은 백제시대의 성들이 곳곳마다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아차산에도 수많은 백제시대의 성이 있었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15년간 7곳을 발굴한 결과 보루성들이 모두 고구려 성이라고 발표를 하므로 서 문제의 심각성이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강권에서 각축전이 가장 심했던 삼한시대나 삼국초기에 대한 인식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삼국 초기나 삼한시대의 성들이 곳곳마다 발견이 되고 심지어 기원전 수 백년전의 청동기 이전의 성들도 발견이 되고 있음에도 아차산 일대는 6세기 고구려의 보루성 유적밖에 없는 것으로 발굴 결과를 발표하고 있기에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알 수 있다.

안성시 양성면에서 발견된 마한의 왕도를 지키는 반제리 산상의 군사 성터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삼한시대 얼마나 각축전이 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왕도의 도성 과 연계된 산성이 함께 발견되고 있는 점에서도 삼한시대의 성들이 얼마나 많은 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발굴에서는 삼국이전의 유적에 대해서는 함구하다시피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식민사관의 역사는 삼국초기 이상 올라가는 유적과 유물은 역사에서 제외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강권에서 삼한시대의 토성으로는 둘레 540m 직경 180m의 규모가 작은 고개 길목의 토성이다.

위치는 양천구 신정동 정랑고개로서 삼한 시대의 유물이 산재된 소금 통로의 토성임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의 유물이라는 명칭조차 없는 고고학이 되어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한반도와 연결된 중국에는 우리의 삼한시대와 동일한 진(秦)나라 시기(기원전 221〜기원전 206년)에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도 우리는 성을 쌓을 줄 모르거나 해당이 되지 않는 다고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은폐를 하고 있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이다.

잘못된 문제점을 고치려 하는 것보다 계속 밀어 붙이는 병폐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역사의 결과는 민족사를 축소하고 있다는 것이 아래의 내용에서 도 알 수 있다.

1) 아차산에서 규모가 제일 큰 시루봉 보루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1세기 이전을 추정할 수 있는 연질 토기가 발굴되었음에도 6세기 고구려 성이라고 발표를 하므로 서 시대가 전혀 맞지 않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권에 내려온 시기는 5세기 말이며, 그 당시는 연질 토기가 아닌 경질 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아주 단순한 기본적인 유물에 이르기까지 왜곡하고 있다.

아차산 4보루성 유물도 같은 연질 토기로서 고구려가 남하한 시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유물이다.

2) 지금까지 아차산 일대를 15년간 7곳을 발굴한 결과 보루성 모두가 고구려 유적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그이전의 역사 유적은 없다는 결론에서 식민 사학의 범주를 답습하고 있다.

한강권은 삼국이전에도 가장 각축전이 심했던 지역임을『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알 수 있음에도 심층적으로,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3)발굴자의 주장대로 모두가 고구려의 보루성이라면, 고구려가 오랫동안 소규모의 보루성을 쌓고 국지전을 전개한 내용이 된다.

그러나 고구려가 오랫동안 아차산에서 소규모의 국지전을 전개할 상황이 아닌 것은 대병력으로 일시에 공격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백제는 공주로 천도를 하였다.

아차산은 백제 왕도의 문전으로 소규모 병력이 보루성을 쌓고 오랫동안 주둔하는 전쟁의 양상은 있을 수 없는 지역이다.

또한 백제가 공주를 천도 했을 무렵에도 고구려가 소규모의 보루성을 많이 쌓고 오랫동안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다음과 같이 위치적으로 고구려 유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4) 보루성 중에 용마산과 수락산 보루성은 한강보다 중랑천과 마들 평야를 장악하기 위한 위치이다.

그러므로 대규모의 병력과 강대국인 고구려가 소규모의 병력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한강변을 지척에 두고 마들 평야를 조망하는 보루성을 축성한 것은 대병력의 고구려와 부합이 되지 않는 위치의 보루성이다.

보루성은 소규모 병력이 충돌하는 지역에 오랫동안 주둔하기 위한 시설로서 한강변이 아닌 수락산 보루성은 위치적으로 남북이 아닌 동쪽과 서쪽을 차단하는 세력권이 조성할 수 있는 유적이다.

5) 시루봉 보루성의 특징은 성벽에 붙여 판석으로 배수로를 조성한 석성으로 지금까지 아차산 이외는 발견된 적이 없을 만큼 성 축조 방식에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면이 있다.

이러한 것은 시대를 달리하거나 문화가 다른 축성방식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6) 아차산 시루봉 성의 축조 방법도 고구려나 백제에서 보기 드문

소규모 여러 단계로 축성한 성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러 단계로 축성한 성은 대부분 소국의 유적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되고 있다.

예 : (1) 춘천 맥국의 산성, (2) 진주 대평면 대평리 성 유적, (3) 진주시 고성산성,

7) 유물의 밀집도가 낮고 대형 토기가 발견되지 않는 다는 것도 연질 토기를 사용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6세기 고구려와는 관련이 없는 유물이다.

8) 워커힐의 아차산 백제시대의 성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물은 경질 토기가 많아 보루성에서 출토된 연질 토기와 비교를 하면 보루성 유물이 훨씬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다.

이러한 차이는 아차산 백제의 성 축조 보다 앞선 보루성임을 입증하고 있어, 보루성은 고구려 유적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9) 현 식민사학은 민족사를 축소하기 위하여 삼한시대나 삼국초기의 역사를 거론하기 어려운 학문구조이다.

그러므로 한강권은 삼한시대의 군사 유적은 제외되었고, 아차산의 작은 보루성까지 6세기의 고구려 유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10) 고구려는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보다 굴복시키는 정복전쟁이 많은 만큼 아차산에 보루성을 쌓고 오랫동안 주둔하는 국지전을 전개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고구려가 영토를 차지하려 한다면 만주지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열려 있는 나라이다.

11) 최근에 구리시와 인접한 남양주 일대를 조사한 결과 보루성과 함께 백제시대의 차단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많은 토성의 군사 시설들이 남양주 전 지역 곳곳마다 발견되고 있고, 아차산보다 훨씬 거리가 먼 포천 쪽의 남양주에도 백제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보다 중요한 아차산 북쪽에 백제 유적과 관련된 내용은 없고 고구려 보루성만 부각 시키는 것은 허위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 왜곡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 예로서 하남시에서 백제의 왕도를 3년간 발굴하면서도 하나같이 은폐하였고 소규모의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을 왕도라고 계속주장 축소해왔던 전과에서 도 알 수 있다.

세계에서도 유래가 있을 수 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슬픈 일이 되고 있다.

위와 같은 내용에서 본다면 아차산 보루성 들은 소규모의 세력들이 장기간 서로 대치하고 있었거나 백제초기의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는 유적이라는 것을 유물과 유적에서 입증되고 있다.

필자가 많은 유적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유물을 판독 할줄 알기 때문에 마한의 왕도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것은 500년 이상 확연히 차이가 나는 유물을 두고 논하는 것조차 문제의 심각성이 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문헌 기록과 대조해 보면 한강권은 삼한시대 소국들이 얼마나 각축전이 심한 지역인가를 알 수 있어 그 당시 말갈과 낙랑 마한의 제반 세력인 백제 초기 등이 어우러지면서 백제가 한강 북쪽에서 견디지 못하고 하남으로 천도할 만큼 각축전이 심했던 곳이다.

아차산 보루성들이 고구려의 6세기 유적으로 발표를 하므로 서 그 이전에는 다른 군사 유적이 없다는 결론이 얼마나 문제점이 많은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한강권 유적을 두고 고구려나 신라의 유적으로만 치부하므로 서 한강본류 백제시대의 큰 성은 모두 몽촌과 풍납토성 밖에 없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 왔던 시각이다.

심각성을 알 수 있는 것은 발굴까지 한 하남시의 유적을 은폐하면서 그 동안 풍납토성의 왕성설을 주장하면서, 최근에는 한강권에서는 백제의 왕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학문적인 양심이 없는 가를 알 수 있다.

이성산성이 인근의 다른 유적과 관련되어 왜곡이 얼마나 심한가를 살펴본 내용들로서, 백제사 전채를 축소말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왜곡들이 세계에서 유일한 이성산성의 문화적인 가치를 떨어뜨리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위상에 이르기 까지 피해를 주고 있다.

민족의 우수성까지 저해하면서 진리를 외면하는 발상이 도를 넘고 있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술적인 문제는 일반인들은 구별하기 어렵고 내용을 잘 모르기에 힘의 논리에 의하여 왜곡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것을 단절하기 위해서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누구도 쉽게 알 수 있는 단순한 유적을 두고 결판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 고분이다.

무덤은 다른 유적과 달리 구분이 단순하므로 진위 여부를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택하게 된 유적은 지금까지 한강권에는 일본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없다고 학계에서 단정 하였고 하나의 정설이 되어 이를 뒤집는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싸움이 있었다.

그것도 발굴하여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이 나버린 유적을 두고 전방후원분이라고 주장을 하므로 서 반발이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적들이 모두 전방후원분이라는 것이 발굴에 의하여 밝혀지자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1년 후에 또 다른 전방후원분을 암암리에 발굴한 결과 전방후원분임이 명확하게 밝혀지자 더 이상 문제를 삼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방후원분, 시민단체 강제 발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 없는 크나큰 대사건이 되었다.

그 당시 사회단체에서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 걸려 있기에 물러 설 수 없었고, 발굴 조사한 강단사학에서도 그동안

조사 발굴하였기에 강하게 공식적으로 고분이 아니라고 언론을 통하여 반발까지 하였다.

이렇게 단순한 고분까지 판독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의도적인 왜곡을 하여 왔었다는 것이 하남시의 백제왕도의 유적과 전방후원분 사건으로 장기간 점차 확대 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유적을 너무 오랫동안 왜곡 부정하게 되면, 이에 반발하는 보이지 않는 진리의 복병을 자연스럽게 길러내는 토양이 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자는 학설로 편 가르기를 하고 정치인들은 정략적으로 개인은 재산권을 위해서 지금까지 백제사를 왜곡 방치하여 왔던 것이다.

진정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지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5. 한강권 유적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전환

이성산성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유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이성산성의 성돌은 옥수수 알처럼 생겼고, 성벽은 각도가 60도로서 기초석이 단 한 개 밖에 없어 90도 각도의 일반적인 성벽과 판이하게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90도 각도의 석성은 기초를 대부분 1〜2m 정도 깊게 조성해야 되는 구조이다. 그러나 60도 각도의 이성산성은 기초석이 단 한 개의 작은 돌로 되어 있어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성이다.

60도 각도의 성벽은 아랫돌을 빼내어도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적이 성벽을 타고 올라 올 수 있기에 표면을 둥글게 하여 미끄러지도록 하였던 것이 이성산성이다.

이러한 축성법은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백제의 축성술이 그 어느 나라 보다 발달하였음을 입증하는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옥수수 알처럼 생긴 성벽의 또 다른 장점은 곡선지형에 자유롭게 부합이 되도록 축성 할 수 있는 성이다.

표면이 반듯한 성 돌은 짧은 곡선지형에는 굴곡을 유연하게 처리하기 어려우나 표면이 원형인 성돌은 곡선미를 자유자재로 살릴 수 있기에 보다 한국적인 미적 감각을 살리고 있는 예술적인 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성산성을 연구한 결과 찬란한 백제사가 함축 되어 있는 미적인 감각적인 면에서도 세계 제일 아름답고 잘 쌓은 석성이다.

석성의 문제점은 적들과 싸움이 시작되면 성을 허물기 위해서 성벽 아래쪽의 돌을 빼내면 쉽게 무너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성 산성처럼 60도 각도의 성벽은 밑의 돌을 빼내어도 성벽이 허물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옥수수 알처럼 성돌을 다듬는다는 것은 그 만큼 공이 많이 들고 무엇보다 화강암과 같은 석질의 돌이 아니면 성을 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산성은 아무 곳에서나 성을 쌓을 수 없는 고급 석성에 속하는 성이다.

이성산성과 같은 석성을 쌓는 다는 것은 많은 공력이 들고 축성 기간도 그 만큼 오래 걸리는 고급 성이기에 경제나 문화가 앞서있는 중심지에서만 쌓을 수 있는 성이다.

만약 고구려나 신라가 이러한 이성산성을 쌓았다면 그들의 왕도에는 이보다 더 고급적인 축성의 유적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산성과 같은 성은 세계적으로도 발견된 예가 없는 희귀한 성으로 처음에 발굴이 되었을 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미라고 극찬을 하였을 만큼 곡선의 아름다움이 있는 성이다.

이러한 성을 지금까지 고구려나 신라의 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들어나고 있다.

성내부에 조성된 다각형 건물도 일반적인 건물이 아니라 신전 건물로서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9각 건물지이다.

이성산성의 다각형 건물지는 무엇을 의미 할까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태양을 숭배한 것으로 9각 12각 8각의 다각형 건물지는 하늘에서 제일 밝은 태양과 달 금성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대한 신전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고대의 제정일치 사회의 기본적인 것은, 나라에는 나라와 관련된 신(神)을 모시는 곳이 있고 마을에는 마을과 관련된 신앙지가 있으며 일반 개인의 집에는 가신(家神)을 모시는 장소가 있다.

이성산성 성안에서 백제를 건국한 부여족 무덤이 발굴되었고 하늘에서 제일 밝은 일월성신을 모신 신전이 발굴되면서 백제왕도의 신앙지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성산성 내부에는 금성과 관련된 금성분(金星墳)이 발굴되었으며, 이 고분을 두고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엄밀하게 보면 앞은 네모이고 뒤는 원형이라는 고분은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모양은 없다.

일본에는 앞은 방형이 아니고 물고기 꼬리 모양의 삼각형과 유사하고 우리나라에는 뒤편이 원형이 아니고 8각이나 또 다른 모양이 있어 고분의 명칭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기에 금성과 관련된 근원적인 뜻으로 금성분이라 명칭하게 되었다.

학문의 명칭은 무엇보다 명확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고분에 대한 발생 근원지가 우리나라이기에 일본에서는 2500기나 되는 무덤이 있기에 수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원류의 발생지역이 아니기에 금성과 관련된 고분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에는 다양한 모양의 초기 금성분은 없고 정형화된 모양만이 있어 발달과정을 알 수 가 없고, 우리의 시각은 한강권에는 아예 금성분이 없다는 결론까지 내린 것으로 관심조차 없는 심각성을 보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주장하고 있는 전방후원분이 발견되었다고 유적까지 지적하여도 이를 부정하였고 하남시 백제 왕도를 발굴까지 하였어도 은폐 하였던 만큼 한강권 모든 유적을 재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심각성이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돈으로 환산 할 수 없고 엄청난 부가가치와 경제적인 면에서도 크나큰 피해를 당하고 있기에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남시에는 세계적인 이성산성과 함께 격이 높은 유적과 유물이 남한산성과 고골일대에서 발굴되고 있어 문화적인 부가가치가 높은 유적이 다음과 같이 산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세계 유일한 이성산성의 아름다운 성벽

(2) 세계 최대 규모의 금성분과 문화의 발생지로서 천문 사상이 그 어느 나라 보다 발달한 곳이다.

(3) 천왕사 목탑지와 동사지 목탑의 규모는 모두 황룡사 목탑보다 큰 규모의 목탑이 3곳이나 된다.

(4) 한 장에 20kg 정도 되는 세계 최대 크기의 남한산성의 백제 기와는 한성백제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건축술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5)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고려시대의 철불이 조성된 곳으로 천왕사 성불의 규모를 알 수 있는 한성백제의 후신이다.

(6) 백제의 덕풍천 운하의 조성으로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의 석재를 운반한 우리나라 제일 오래된 운하로서 그 규모를 예상 할 수 있는 방대한 규모이다.

(7) 역사상 일본과 중국을 다스린 동양 최초의 한성 백제 위력의 발상지로서 가장 왕성 하였던 민족 전성기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8) 우리나라 3대 도읍지에 속하는 곳이며, 남한 표준말의 발생지요 북한의 표준 언어 개성 말까지 모두 한성백제문화의 어원에서 발생 하였다.

(9) 삼국의 역사를 우리나라 분열의 도구로 응용하여 왔던 것을 차단 할 수 있는 유적이다. 한성백제 오백년 역사는 우리나라 중심의 대표적인 통합문화로서 한강 기적의 뿌리이며 한류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10).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끊임없이 역사 왜곡을 당하는 위치로서 이러한 악순환을 극복하고 그 들을 능가하는 유적이 발견되므로 서 역사 왜곡을 잠재울 수 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줄 수 있는 긍지의 이력서이기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내 놓을 수 있는 문화유적들이다.

(11) 역사의 큰 뜻은 심판과 교육의 기준이 되는 잣대로서 진실을 외면하면 가치관이 흔들리고 심각한 병폐를 자아내기에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2) 당나라가 자국을 비우고 13만 대군을 동원하여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동양 최초로 국제전을 전개한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당나라 이전의 수(隋)나라가 고구려와 싸워서 멸망하게 되는 과정이 42년 밖에 되지 않은 시기에 당나라가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무서운 나라가 백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간략하게 살펴보아도 한강권 일대의 잠재력과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찬란한 문화유산을 선조들이 물려주었으나 오히려 저해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현상은 부끄러운 일이 되고 있다.

한강권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백제 말기에 고구려나 신라가 이 지역에 진출은 하였으나 변방이기에 기존의 성을 보축하여 사용 할 수는 있으나 새롭게 장기간 축조한 유적의 흔적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성산성을 고구려나 신라의 성이라고 주장 하므로 서 식민사학의 본색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되고 있다.

또한 삼국 초기의 한강권은 삼한을 비롯한 백제의 전신인 십제국과 고조선의 국가인 낙랑과 말갈 등 수많은 세력들이 한강권에서 각축전을 전개한 지역임에도 그들의 역사와 유적을 말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민족사를 오백년 이상 축소 말살하면서 비하하는 풍토를 조성하므로 서 그 병폐가 잘못된 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종섭  gjilb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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