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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인생을 걸다, 유충열(弄月) 화백“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살다가 간다”

 

 

광주(廣州)가 낳은 세계적인 화백

 본 신문사에서는 유충열 화백의 인생역정과 고난의 세월을 예술로 승화시켜, 세계적인 화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화가로서의 인생외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유화백의 식지않는 열정과 끈기,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이글을 읽는 독자들과 여러 예술인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편집자 주) 

 

세계123명의 예술가 중 영국(Art in Vogue)표지작가 1명에 선정

지도선장의 원작자이자 세계적인 화가

세계적인 미술 대중지 데코(Decor)도 인정한 지도 선장



▢ 중학교 진학도 못할 만큼 어려운 가정에서 출생

유 화백이 태어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무수리에는 마을 앞 강가에 큰 느티나무가 있고 나룻배가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외할머니께서 이름을 짓고 "각설타 유충열이 백군을 거느리고 금산에다 진을 치고 여봐라,할 때가 올 것이다"라고 시를 지어주셨다.

광주초등학교를 졸업한 유 화백은 가난한 집안환경으로 상급학교 진학과는 인연이 없었다. 일찍부터 공책이나, 스케치북, 벽 같은 곳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문방구 점원을 시작으로 공장일 등을 거치며 열아홉 살이 될 즈음 유 화백은 내가 이렇게 살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인가? 하며 다니던 태권도 도장 박춘일 관장님과 최영환 선생님의 도움으로 태권도 특기생으로 야간고등공민학교에 진학했다.

이모가 운영하는 식당(한성관)일을 도우며 주경야독을 했다. 소망했던 교복을 입은 학교생활은 더없이 부러울 것이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이 성남상전(現 송림고)에서 유 화백의 그림인생의 길이 희미하게나마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 넌 화가가 되어라

유 화백은 만화책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12색 볼펜으로 만화표지를 따라 그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날도 만화 책표지의 슈퍼맨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탄생하는 순간을 밤늦게까지 그리고 있었다.

밤 2시경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 30여분 쯤을 기다렸으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친구(강성구)의 자취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두운 자취방 좌측 문 앞에 평소 쓰지 않고 방치하던 낡은 책상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적으로 이 서랍 속에 큰 장초 하나만 있으면 저 그림을 끝내고 잘 수 있을텐데,하며 그 책상 서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손아귀에 한 번도 쓰지 않은 기다란 장초 하나가 잡혔다.

초가 손에 잡히는 순간 온 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넌 화가의 길을 가라.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화가로서의 운명이 벽을 뚫고 슈퍼맨처럼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여고생에게 8백원을 받고 그림을 팔아

그림을 그리겠다며 처음 산 것은 포스터칼라 물감이었다. 물감을 쓸 줄도 모르면서 달력 명화를 따라 그렸다. 그 중 마음에 드는 그림을 표구하려고 화방에 갔다가 여고생에게 8백원을 받고 팔았다.

이게 나도 그림을 팔 수 있구나.하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계기가 됐다. 그림을 그려 판넬을 제작해 자취방 벽에 걸어놓았는데 유 화백이 없을 때 친구가 몰래 훔쳐간 적도 있었다. 수학여행비 3만 5천원으로 유화 물감을 사서 3일 내내 그림을 그렸는데 이때 그린 그림은 수학여행을 다녀온 친구 차배석(지금은 고인이 됨)이 5천원에 사갔다.



▢ 그림을 배우고 싶습니다 스승을 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

유 화백이 다녔던 야간학교에는 미술부가 없었다. 그래서 주간 미술부 송창 선생님에게 부탁, 밤에 혼자 남아 그림을 그렸다. 표현력이 좋네. 미술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처음으로 전문가에게 들은 말이었다. 캔버스 살 돈이 없던 차에 미술을 좋아했던 다른 선생님이 캔버스를 사 줄 테니 네가 그린 그림을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야간부 학생들도 모두 돌아간 뒤, 밤늦게까지 그림에 빠져 혼자 미술실에 남아 있다가 당직 선생님에게 들켜 귀가하기도 했다.

3학년이 될 즈음, 평소 존경하던 학교 김칠백 선생님께 진로에 관해 여쭈었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부모님은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셔요.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불효가 되지 않게 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네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불효가 되어도 해라고 하셨다.

 

그때 그 말씀이 유 화백이 판단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유 화백은 제대로 그림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친구와 함께 서파화실에서 백성연 선생님에게 동양화를 배웠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유화를 그리고 싶어 그만 두었다.

그리고 입시미술학원에서 한 달간 데생을 배웠다. 유 화백 인생에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운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이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우연히 보았던 호림미술학원이었다. 영등포에 있는 그 미술학원을 무작정 찾아가서 자신이 그린 그림 2점을 보여주며 찾아간 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그림을 꼭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돈을 내고 배울 상황이 안 되니 저를 재워주고 밥만 먹여주신다면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그림을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학생을 거두어주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올라간 것이니 돌아갈 차비도 없었다. 그림을 배우고 싶으면 삼각지에 화실이 많으니 거기 가보라는 말을 듣고 미용실에 들어가 가져 온 그림을 2천원에 팔아서야 성남으로 돌아갔다. 그 후 사당동에 있는 예술인 마을에 가보기도 했지만, 다들 담만 높게 쌓아놓아 들어갈 수도 없었다.



삼각지도 가 보았다. 당시 삼각지에는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려 매매하는 시장이 활성화되어있었다. 역시 무턱대고 화실들을 기웃거렸지만 돈을 내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중 한 화실에서 북가좌동에 있는 화실을 소개해 주며 약도를 그려줬다. 친구와 함께 북가좌동 화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개인화실이 아닌 그림회사였다. 우리는 화가가 필요하지 배우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이 그들의 답변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쇼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유 화백에게 나가라고 했지만, 유 화백은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그쪽 직원의 손에 이끌려 사무실 밖으로 쫓겨난 유 화백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 울면서 2층 계단을 내려와 1층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을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낙심하여 친구와 함께 성남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래도 왠지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유 화백의 그림을 향한 열정은 더욱 강해졌다. 이 상황에 대해 학교에 가서 송창 미술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며칠 후 그 선생님은 약도가 그려진 조그만 쪽지를 전해주며 유 화백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도 발버둥을 쳐서 이걸 주는 거야.



▢ 잊을 수 없는 그 날, 1981년 8월 1일 김종대 선생님 문하생으로 입문

송창 미술선생님께서 그려준 약도쪽지를 가지고 경기도 시흥에 있는 화실을 찾아가 김종대 선생님 문하생으로 허락을 받았다. 먹는 것은 스스로 해결하고 숙식은 화실에서 하고 대신 심부름을 해주기로 했다. 그때 유 화백은 결심했다.

이제 유충열 인생이 시작된다. 나는 세계적인 화가가 될 것이다. 인생을 모두 걸면 못 될 것이 뭐가 있겠나. 유 화백의 청년시절은 이렇듯 열정과 호기로 충만했다. 가진 게 없어도 꿈과 희망, 열정이 있어 부자였다.

그림이 아니라 인생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선생님을 도왔고 열심히 그림을 배웠다. 늘 화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물감 심부름뿐 아니라 팔레트까지 깨끗이 정리해 드렸다.

그런 유 화백의 모습을 본 김종대 선생님이 격려를 해주셨다. 그림에 대한 집념만큼은 너에게 사고 싶구나. 유군아! 너는 된다.

 

▢ 군대에서도 인정받은 그림, 弄月이라는 호

유 화백이 입대하자 소대장인 이상혁 하사가 사회경험을 물었다. 화가 지망생입니다." 그는 학교 다니면서 미술상이라도 받은 게 있냐고 물었다.

없습니다했더니 상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무슨 그림을 그리겠다 그래, 화가 그만둬라고 짓궂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유 화백은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유 화백을 30cm 대나무 자로 손등을 때렸으나 시간이 지나며 농월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음풍농월의 농월이었다.

그는 그 뒤로도 유 화백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림을 선물 해달라면서 캔버스를 사주기도 했다. 캔버스를 다 쓰면 보이는 종이마다 그림을 그렸다. 차트에도 그림을 그렸다.

 

물감이 없으면 연필로 스케치를 했다. 친구(이한행)가 지어준 설매(눈 속에서 핀 매화)라는 아호도 있다. 제대 후 김종대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는 인물화를 그리고 싶습니다“라고 편지를 썼고 선생님은 올라오라고 했다. 그때 유 화백은 일기장에 적었다.

이제 유충열의 진짜 인생이 떡 벌어지게 시작된다. 세상 사람들아! 유충열이 어떻게 세계적인 화가가 되는지 똑똑히 지켜봐라 세계적 화가 유충열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지켜봐라. "유충열이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내는지를 똑바로 봐라 유 화백은 힘든 시기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웠다.

그 시기 하루 세끼는 유 화백에게 사치였다. 일부러 아침을 늦게 먹고 늦은 저녁을 먹어 하루 두 끼로 버티면서 오직 그림만 그렸다. 그는 밥 대신 열정과 희망을 먹었다.



▢ 어머니, 돈 벌어서 올께요, 그때까지만 살아 계셔요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자궁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다.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계셨다. 병상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시간이 흐른 뒤 어머니를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가 되어 효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릎을 꿇고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엄마 나 서울 가서 돈 벌어 올 때까지 꼭 살아계세요."라고 말하는데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꼭 가야되니? 하며 힘없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병실을 떠났다. 매제(정성균)가 따라나오며 차비하라고 만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김치통을 들고 터미널로 가는 길 300∼400m 를 걸어 내려오는 동안 내내 눈물을 쏟았다. 그림에 끌려 시흥으로 돌아온 유 화백은 잠을 자기 위해 화실 나무탁자 위에 누워서도 계속 눈물을 쏟았다. 울다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 뒤 더욱 열심히 그림에 매달렸다.

그림을 그리다 지쳐서 잠이 올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새벽에 잠들기가 일쑤였다. 몇 달이 지나 항암치료 차 여관에 방을 얻어 서울에서 통근치료를 받으러 올라오신 어머니를 뵈러갔다.

 

엄마 혼자 밥을 해드시면서 치료받으러 다니셨다.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화실에 간다고 하니 엄마가 자고 가라고 잡으셨다. 주머니에 있던 돈(이천원)을 털어 엄마 반찬으로 오이지를 사드리고 엄마와 잤다. 그런데 이것이 이승에서 엄마와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다음날 오후쯤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화실로 오는데 차비하라고 만원을 주셨다.



▢ 배고픔도, 죽을 병에 걸린 어머니도 뚫어버린 그림을 향한 강한 의지

유 화백이 새로 만난 스승은 삼각지 화실에 있던 강원 선생님이다.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님은 선장을 그리고 계셨다. 선장과 배, 바다 그림과 그 밖의 인물화그림이었다. 그 때는 그런 선장그림이 있는 줄도 몰랐다.

선생님이 그리니까 그저 따라 그렸다. 선생님을 만나 잠자리는 해결되었지만 먹는 문제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점심은 고맙게도 선생님이 도시락을 싸다주셨고 아침밥과 저녁밥은 선생님이 사준 석유버너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일부러 면이 굵은 라면을 골랐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배가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중에는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욱하고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그 시절 화실에 수돗물이 나오질 않아 설거지통을 들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던 일, 여름날 밤 더운데 목욕을 할수가 없어 남에 건물 2층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고 목욕을 하다가 주인이 밖에서 화장실 문을 열쇠로 잠그고 가 작은 창문을 통해 빠져나와 벽을 타고 내려왔던 일, 저녁시간에 삼각지의 상명초등학교 수돗가에서 몰래 설거지를 하다 수위아저씨에게 들켜 쫓겨났던 일 등이 유 화백의 추억 한 켠에 켜켜이 쌓여있다.

 

그 사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유 화백은 집에 갈 여비조차도 없어 못 내려갔다.

당시 미국으로 전업화가들의 그림을 수출하는 회사들이 있었다. 선생님을 찾아온 수출회사의 간부직원 조세진 부장에게 유 화백은 자신은 그림을 그려 돈를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인물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값싼 풍경화를 원했다. 자신이 선생님께 배웠던 선장을 빼고 '배와 바다'만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림을 그려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그저 좋았다. 그래서 집에 어머님에게 저도 이제 돈을 벌 수 있게 됐어요,라고 편지를 썼다. 여동생(유춘순)한테 들은 얘기인데 ‘엄마가 이 편지를 받고 이놈이 이제 돈을 버나보다’ 라며 여동생과 함께 우셨다고 했다.

하지만 돈벌이는 수월치 않았다. 섬세한 터치가 들어가는 인물화를 그려왔던지라 풍경화를 그리더라도 섬세하게 붓질을 했고, 그러다보니 작업시간이 더뎠다.

 

돈을 받더라도 겨우 물감을 사서쓰기도 빠듯했다. 다행히 같은 화실에 있던 유경하님이 자신의 물감을 쓰도록 배려해 주었다.

선배나 선생님들이 그림이 더디고 숫자가 안 나오니까 회사에 가서 그림 값 좀 올려 달라고 그래라고 부추겼다. 유 화백은 회사의 조부장님에게 그림 값 인상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밥이라도 먹여주려고 그랬더니 꾀가 나니? 회사에서 네 그림을 받아주는 것은 회사에서 너를 키워주려고 하는거야“ 라고 했다. 그 이후 다시 강원 선생님에게 말씀드려 낮에는 싼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선생님 그림을 배우기로 했다.

 

그 시기에 처음 시도한 게 KAL기 폭파사건이었다. 남영동 가판대 등을 뒤지며 KAL기에 대한 자료사진을 수집했다. 민족의 아픔이니 그림을 그릴 때마다 경건해졌다.

종교도 없으면서 항상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 뒤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대한항공사에 기증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집에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세상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고 싶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머리하며 바싹 마른 어머니의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2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셨다고 했다. 그 동안 너무 울어서였을까? 누워있는 어머니를 본 불효자는 마른 눈물만 삼킬 뿐이었다. 아들을 본 어머니는 작은 소리로 이놈아! 그렇게 못 오니! 하셨다.

옆에 앉아계시던 아버지께서 너도 사람의 자식이냐? 하셨다. 불효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는 눈을 뜨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불효자의 손으로 울면서 그 눈을 감겨드렸다. 상을 마친 뒤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고 집에 식구들만 남았다.

 

아버지는 소리 내어 우셨다. 그때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2∼3일이 지나 유 화백이 있는 사랑방에 아버지가 들어오셔 잠시 앉아계시더니 말씀을 꺼내셨다. 너 그림 그리러 또 서울 올라갈거면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고 가라고 하셨다.

아버지 저 그래도 가야 돼요하고 말씀드렸더니 “이놈이 이게 말이야 절이야”라고 하셨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와서 그림을 그렸다.

회사에 이야기를 하고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한 평 남짓한 장독대 광에 작업실을 차렸다. 딱 한 사람 들어갈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림경기가 안 좋았다. 이렇게 젊은시절의 아까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미래를 위해 마지막으로 선생님 밑에 들어가서 더 배우는 게 낫겠다 싶어 선배 심정규 형의 소개로 선생님께 그림을 배우러 들어갔다. 그 선생님이 김길택 선생님이었다.

 

 

 

 

 



 

 

하늘이 준 시련도 막지 못한 꿈을 향한 의지

유 화백의 결혼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 가정을 꾸리면 그림을 그린다고 서울로 돌아다니지 않고 정착하겠거니 생각한 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했다. 지금의 부인(김금순)은 군대 가기 전부터 교제했다.

후일 부인은 (사)대한노인회에서 수여하는 효부상을 받았다. 하지만 결혼하고서도 그림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임신 중인 아내를 집에 두고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와서야 귀가했다.

 

깊은 밤, 아내가 있는 사랑방에서 아이울음 소리가 들렸다. 문을 살짝 열고 살폈더니 아직 주름살도 채 안 펴진 갓난아이가 누워있었다. 그러나 아내와 아가(아들 유재남, 후일 고등학생 때 국회의원 표창장 수상) 옆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 아버지 몰래 그 곁을 떠나며 혹시 TV 뉴스에 가마니로 덮은 시체가 있어 주인을 찾습니다하는 뉴스가 나오면 그 시체가 나 인줄 알아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기고 죽겠다는 각오로 집을 나섰다.

 

얼마 후 친구가 찾아와 아들이 폐렴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자꾸 이런 시련을 주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집에 내려갈 차비도 없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그저 선생님의 주문받은 그림(100호 밑그림)만 그리고 있는데 기다리던 친구(박종하)가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내가 간다고 죽을 놈이 사냐?라는 말이 나왔고, 옆에서 듣고 계시던 선생님이 그러는 게 아니다. 갔다와라 하셨다.

그래서 화실 앞에 있던 중국집에서 차비 만원을 빌려 집에 내려왔다. 집에 그려두었던 그림을 친구(송대현)와 함께 들고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팔고 친구의 학원비를 빌려 겨우 병원비를 마련해 입원시키고 그날 밤 다시 서울 화실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들과 아내의 얼굴이 그림 위에 자꾸 어른거렸다. 여름 35도가 넘는 무더위가 계속됐다. 화실식구 모두 퇴근 후 화실창문을 모두 닫고 한쪽 구석에 있던 난로 두개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무릎을 꿇었다. 땀이 등을 타고 비 오듯 흘러내렸다. 더위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이걸 이겨내야 한다. 이걸 이겨내야 한다. 이걸 이겨내야 한다. 유 화백은 도를 닦는 마음으로 반복해서 되뇌었다.



둘째아이는 그림에다 바치다

하루에 열아홉 시간이나 그림을 그린 유 화백을 가르친 김길택 선생님은 정직한 분이다. 인상파, 선장 등의 그림을 그리고 계셨는데 다른 선생님들처럼 용돈을 주겠다고 하고 주지 않는 법은 없었다.

한날은 다른 선생님들에게 월급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푸념처럼 털어놓자 선생님이 말했다. 인간들은 꼭 잘 해준 건 이야기 안하고, 나쁘고 서운한 것만 떠들고 다닌다. 유 화백은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강한 충격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며 선생님은 유 화백에게 넌 임자 만난 줄 알아라하셨고, 또 넌 수제자다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선생님은 유 화백에게 그림뿐 아니라 정직함, 삶까지 가르쳐주었다. 선생님이 사정상 문하생들을 내보내야 했을 때에도 유 화백만큼은 끝까지 챙겼다.

예비군훈련 때문에 일주일간 집에 내려왔다. 훈련 시작하던 날 시술(당시 국가시책)을 할 사람은 나오라고 지휘교관이 말했다. 시술도 무료이고 일주일 훈련을 빼준다는 것이었다. 유 화백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시술을 결심하고 실행했다.

 

그래, 둘째아이는 그림에다 바치자! 시술을 하고 이튿날 다시 서울로 올라갔지만 당시 선생님도 사정이 어려웠고 유 화백은 가족을 위해 적은 돈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래 선생님 밑을 나오는데 “저런 놈이 되도 크게 된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림에 대한 투철한 정신을 일깨워 주신 지금도 마음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세계를 향해서 - 1985년 6월 최초 지도선장 창작

예전에 일했던 조세진 부장에게 전화해 싼 그림이라도 그려야 했다. 조부장은 말도 없이 가더니 아쉬워지니까 또 왔어라고 했지만 일거리는 계속 주었다. 돈 때문에 배와 파도를 그렸지만 인물화를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배그림보다 시간이 더 들고 값을 더 쳐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본능적으로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배와 파도를 그렸고, 다음에는 선장을 넣었다.

선장에게는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나씩 지도선장을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 그림을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대미 유화 수출회사 대륭의 사장(조성윤)이 처음 보는 지도선장을 가까이서 또는 멀리 떨어져서 유심히 살펴보더니 한번 보내봅시다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래도 유 화백은 여러 소재를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지도선장을 업그레이드 시켜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말했다. 유충열씨, 그림 주문 왔어요! 그 주문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받아가는 유 화백은 차를 타러가는 길에 받아든 캔버스를 허공에 던지며 기쁨을 자축했다.

그런데 두 번 정도 그렸는데 중지를 시켰다. 그림이 안 나간다며 지도와 나침반이 안 들어간 선장을 그리라고 했다. 약 한두달을 그렇게 지낸 어느 날 회사사장이 유충열 씨 그림 일주일에 열장정도씩 보내라고 다시 주문이 왔어요!라고 했다.

 

드디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주문이라는 건 첫 주문과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 화백의 창작품이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열 장 정도를 주문하더니 곧 그릴 수 있는 대로 그려서 보내달라고 했다. 당시 성남하대원동에서 여러 선배님들과 함께 월 화실비를 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좀 더 창작에 몰입이 필요했던 유 화백은 회사에 광주에 화실을 차리도록 백만원을 가불해달라고 했다.

회사에서는 흔쾌히 응했다. 작은 전세방이었지만 그렇게 지도선장은 광주에 자신의 힘으로 첫 번째 화실을 만들어 주었다. 지금의 화실도 지도선장이 차려준 화실이다.



세계적인 미술 대중지 데코(Decor)도 인정한 지도 선장

1986년 유 화백의 그림이 미국에서 발행, 전 세계에 팔리는 대중미술지 데코에 실렸다. 회사에 들어가니 대륭의 조성한 사장이 충열아 네 그림 데코지에 실렸다며 지도 선장이 수록 되어있는 페이지를 뜯어 주었다.

한 차례가 아니라 이듬해 또 실렸다. 그러자 이젠 당시 대미 유화 수출회사 중 가장 규모가 큰 아메리아에서 유 화백의 화실까지 찾아왔다. 이전 회사의 가불금을 갚아줄 뿐만 아니라 화실까지 차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잘 알아주지 않던 시절, 자신을 받아준 회사를 배신할 수 없었다. 당시 개인사정으로 아메리아로 직장을 옮긴 조세진 부장도 찾아왔다. 조 부장은 광주에 스타 났네,라며 이제 은혜를 갚아야지,라고 했다.

그렇지만 바뀐 환경에 처한 유 화백은 그것이 어려웠다. 그것을 아셨을까? 조부장은 그 뒤로 회사에서 유 화백에게 다녀오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머뭇머뭇 하며 안 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아메리아는 그 뒤로도 다른 직원을 통해 몇 번을 더 찾아왔다. 이후로도 다른 그림 회사에서도 찾아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도선장’이 잘 팔리자 유 화백의 다른 작품들도 재조명됐다. 다른 회사에 무료로 맡겼던 ‘비눗방울 소녀’도 더불어 주문이 시작됐다. 당시 다른 회사에 가져다주니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면서 거절했던 그림이었다. ‘비눗방울 소녀’는 다시 돌아 대륭으로부터 주문이 들어왔다.

주문을 감당 못하자 여기저기서 模作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륭에서도 ‘지도선장’의 밀려든 주문으로 미처 다 소화를 못하자 ‘비눗방울소녀’를 다른 화가에게 모작을 시켰다. ‘비눗방울 소녀’는 창작만 해놓고 그렇게 주문이 끝맺음 되었다.

 

다른 그림 수출회사를 가면 유 화백의 작품 ‘지도선장’ 사진샘플이 있었고, 유 화백에게 들어온 ‘지도선장’의 사진 중에는 자신의 그림이 아닌 것도 들어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진품을 가리기 위해 지도를 그릴 때 각종 소품을 활용했다. 붓으로는 따라할 수 없는 터치를 찍어 냈다. 지우개에 지도기호 문양(배, 항구, 등대 표시 등)의 도장을 새겨 효과를 내기도 하고, 선장 모자마크에는 태극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는가 하면, 지도 가장 밝은 부분에 ‘한반도지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그림이 잘 팔리고 있을 때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일이 많아지자 남동생(유구열)도 약 1년여간 화실에 와서 그림을 배우며 도와주었고 화실도 조금 더 큰 데로 옮겼다.

급기야 유 화백을 가르쳤던 선생님에게 모작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가기까지 할 정도였다.



 

 

꿈을 향한 처절한 사투 속의 스스로 찾아가는 세계적인 화가의 길

 

그 의지에 관한 3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1. 김길택 선생님 문하에 있을 때다. 너무 그림에만 신경 써서 였을까? 좌측위쪽의 잇몸이 자주 부었다. 그날도 잇몸 통증으로 머리가 지끈지끈거려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방법을 찾다가 그림을 그리던 나이프를 시멘트 바닥에 뾰족하게 갈아 잇몸 곪은 부분을 푹 찔렀다. 짜내자 뻘건 피고름이 입에서 주룩 흘러나왔다. 재차 꾹꾹 눌러 짜내고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렸다.

 

2.그림을 그린 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밤 12시쯤 퇴근길에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사고 차 옆에 여자가 피가 흐르는 머리를 한쪽으로 떨구고 반듯하게 누워 죽어 있었다. 무심코 누워있는 사람을 쳐다보다가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죽은 사람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이후 그 여자의 얼굴이 계속 뇌리를 맴돌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어 그 상황으로 들어가보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 다음날 밤 12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며 여자가 있던 곳에 가니 흑갈색의 핏자국이 보였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시체가 누웠던 자리에 머리를 두고 하늘을 보며 따라 누웠다. 시체가 뒤에서 유 화백을 끌어안는 것 같았다. 하나부터 백까지 세고 일어나기로 마음먹고 하나, 둘 세는데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빨라졌다. 몇 번을 반복한 끝에 백까지 천천히 끝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3.지금까지 그림의 길을 걸어오며 잡념이 생기고 마음이 해이해질 때는 회초리로 내 손바닥과 종아리를 스스로 때리며 눈물이 핑돌 때도 있었으나 그렇게 채찍질해가며 마음을 다잡고 세계적인 화가의 길을 더듬거리며 찾아갔다. 또 화실 벽에 “정신수련대”라고 써서 붙여놓고 그것을 보며 화실 나무바닥에 주먹을 쥐고 엎드려 ‘정신통일, 정신집중, 정신수련’을 되풀이하며 팔굽혀 펴기를 하며 십분간 기합을 받았다. 무척이나 주먹 뼈가 아팠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나 그렇게 꿈을 향해 다가갔다.

 

주위에서 ‘만년오더’라고 할 정도로 지도 선장만은 영원히 그릴 줄 알았는데 약 3년이 지나자 주문량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유 화백은 여러가지로 변화를 주며 새로운 창작영역을 찾아가며 그림을 그렸다. ‘지도 선장’을 바꿔보기도 했으나 흐름은 흐름대로 가야했다.

 

해외 경매싸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는 작가미상의 ‘지도선장’

그림을 위한 소재를 찾아 해외 사이트를 둘러보던 유 화백은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맞닥뜨린다. “어, 이게 뭐야”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많이 본 그림이고 아주 익숙한 그림인데 작가이름이 없었다. 바로 자신의 그림이었다.

망치로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Allposters.com이었는데 그림제목이 ‘Sea Captain(바다 선장)’에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었다. 자신의 그림이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이트에 올라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으나 그 감동 뒤에 드리운 그림자는 너무나 길었다.

 

“내이름(유충열)이 있어야 당연한 것인데 ‘작자미상’이라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했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변호사협회, 저작권협회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팔을 걷고 도와주는 곳은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찰서에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친구 황선국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곧 한계에 부딪쳤다.

 

그 뒤로 미친 사람처럼 이 사이트 저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지도선장(Sea Captain)을 찾았다. 허구한 날 미친 듯 밤새도록 찾다보니 핼쑥하고 초췌하게 야위어 갔다. 대학생(이준섭)에게 번역료를 지불하고 영어대필을 받아 대표적인 사이트 몇 개를 골라 이메일을 보냈고 “우리와 당신의 이름으로 연락을 하고 싶으면 변리사를 찾으라.”는 답변이 왔다.

 

유 화백의 작품이 돌아다니는 사이트를 찾아낸 것만해도 삼사백 군데나 되어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 장수덕 국제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때 주위에 도움을 청하면 힘이 되어 주기는커녕 빈정거리고 자기 똑똑한 척만 했다.

 

그나마 ‘한국인물사’에 유 화백의 그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 소송에 말없이 도움이 되었다. 변호사 선임비가 문제였다. 천만원을 달라고 하였고 사정해서 칠백오십만원에 계약했다. 성사가 되면 수임료를 더 주기로 하고 백방으로 뛰었으나 가난한 화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이는 없었다.

 

그때 주변사람들에게 지도선장을 사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선지급 후제작 방식이었다. 여동생(유춘순), 친구(이한행, 박철희), 지인(이정선 등) 등의 도움으로 칠백오십만 원을 간신히 조달했다. 그 돈은 미국에 있는 변호사의 선임비라고 했다. 변호사에게 맡기면 소송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맡아주는 줄 알았지만 유 화백 자신의 그림이라는 것을 입증할 자료는 유 화백이 손수 찾아 제출해야 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자료를 수소문하였다. 대륭회사에서도 다섯장의 작품사진을 보내주었다. 미국 저작권협회에 최초의 ‘지도선장’을 포함하여 57개의 지도선장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

변호사가 서두르지 않고 차일피일 진행을 미루는 사이 저작권등록 이후, Sea Captain은 굉장히 많은 사이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아직도 작가명 없이 유 화백의 작품을 판매하고 있는 몇몇의 사이트가 남아있다. 변호사는 이 사이트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진행하려면 이백오십만 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지인(김미경)이 선지급으로 그림을 사주고 백방으로 구해 어렵사리 수임료를 마련했다.

 

하지만 변호사는 소송에 그다지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 변호사는 유 화백에게 직접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의 주소를 찾아내어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줘야 마지막으로 소송을 진행한다고 했다. 영어를 몰랐기에 국내 사이트의 번역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손수 한국어로 번역을 해가면서 간신히 해외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의 주소를 알아냈다. 유명한 사이트의 경우에는 주소가 홈페이지에 기재되어 있었지만 소규모 사이트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찾아낸 곳이 다섯 군데 정도였다. 변호사는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 않고 소송을 받을 대상의 주소를 확인할 수 없으니 소송은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소송은 거기까지였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직접 세계 최대의 경매사이트인 ebay.com에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자신의 이름 유충열(YooChoong Yeul)이 기재된 지도선장을 올렸다. 지금도 ebay에 작가명이 있는 지도선장과 작가미상인 Sea Captain이 나란히 올라있다.

 

소송 비용은 오랫동안 부채로 남아 있었으나 유 화백이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는 덕이 많은 매제 장성균 씨가 위기의 상황을 해결해주어 유 화백에게 이 세상에 더 없이 고마운 사람, 곧 마음의 빚을 진 은인으로 남게 되었다.

 

미국 저작권협회에 지도 선장 등록 이후 변화

 

소송을 진행하며 대한민국 특허청에 지도선장 두 개와 비눗방울 소녀 한 작품을 디자인등록을 마쳤으며, 현재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에 작품 100여점이 저작권신탁 되어있고 앞으로 창작되는 모든 작품도 저작권신탁 되어 국내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힘든 싸움이 채 마무리되지 못했지만 소송 이후 보상이라도 하듯 변화가 있었다. 올포스트와 아트닷컴에서는 유 화백의 그림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더 이상 마음대로 판매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2010년 7월 영국의 미술사이트 artoteque.com에서 이메일 연락이 왔다.

 

작품을 출품하라는 것이었고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출품하는 국제공모전에 출품해 작품이 선정되어 영국의 세계적인 Art Book인 Creative Genius(독창적인 천재)에 소개되었는가 하면, 글로벌 Art Book Art in Vogue 에 수록된 “세계 123명의 예술가 중 표지작가 최종 1 명”에 선정되었다. 이 Art Book은 단행본으로써, 출간되었고 미술사적 DNA 자료로 활용되며, 또 세계적 온라인서점 www.amazon.com을 통해 전 세계로 시판에 들어갔다.

 

작품 등재에 필요한 평론은 (사)국민예술협회 장은정 상임부회장님이 평론비 없이 무료로 써주어 가능했고, 초대작가 등 국내 작가활동을 할 수 있게 초석을 다져준 고마운 분이다.

 

2011.7.22 해외 사이트에 올려놓은 유 화백의 작품을 보고 미국 소설작가 Val Edward Simone로부터 이미지 사용의뢰 연락이 왔다. 유 화백의 지도선장을 자신이 쓴 소설책의 책 표지로 사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도선장에 Yoo Choong Yeul의 이름을 달고 대중에게 알 릴 수 있는 일이다. 사용을 허락했다. 지도선장으로 인해 홀로 마음 아파했던 지난시간들을 생각하면 Val Edward Simone이 더없이 고마 웠고 계약을 체결했다. 그래서 유 화백의 작품 "Captain Delightables Magical Tales of A Minchon Warrior"에 지도선장이 등장했다.

 

또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Val Edward Simone은 유화백의 작품을 표지로 한 어린이 동화 The Fairy Collection을 2012년 2월말 출간해 세계최대의 온라인 서점 www.amazon.com과 미국의 각 대·소형 서점에서 시판에 들어갔다. The Fairy Collection(요정모음집) 책에는 Emilys Wish, Kaylees Secret, Through the Waterfall 등 유화백의 작품 비눗방울 소녀와 소녀와 일곱 요정 등 작품 4점이 책 내용에 도 실려 있다. 또 그 의 출판사 홈페이지 morningsidepublishing.com과 ekidslandpublishing.com index.html 유 화백을 표지작가로 소개하고 있다. 이 를 통해 ‘Val Edward Simone’과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계속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어 미국 목욕용품(수제비누)회사와 캐나다 크리스탈 예술조각 회사에서 이미지사용 의뢰가 왔다.

 

특히 유 화백의 작품이 가장 널리 팔려나간 미국에서는 2009년 전미주 한인총연합회에서 세계문화미술대전과 관련하여 감사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유 화백이 작업하는 화실의 이름은 ‘유레화실’이다. 유레의 뜻은 이름 유 충열의‘유’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레’자를 따서 ‘유레’라고 지었다.

 

유충열 화백은 지도 선장을 과거의 영예를 간직하고 사진으로만 보관하고 있던 [지도 선장]과 [비눗방울 소녀]의 작품을 복원 중에 있으며 [소녀와 일곱 요정]으로 창작의 폭을 넓혔고 더 넓은 창작 영역 속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 현재 유레화실을 운영하며 후진육성과 더불어 자신이 생존해 있을 때나 세상을 떠난 후라도 미술사에 기록되길 염원하는 새로운 작품세계를 개척하는 순수 회화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유 화백! 그는 말한다! 나는 지도 선장을 만들었고 [지도 선장]은 나를 세계적인 화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에 와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살다가 간다. (끝)

 

□ 광주신문사에서 기획,특집으로 다루어

"기획,특집-그림에 인생을 걸다. "나는 이세상에 태어나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살다가 간다"의 4회를 마지막으로 마무리 됩니다. 4회에 걸쳐 연재되는동안 부족하고 미흡한 부분이 많은 저의" 미니 자서전"적인 전기를 읽어주신 광주신문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 올립니다.

4회에 걸쳐 신문기사로 연재되기까지는 한국인물연구원의 박순동편집장님의 5시간 정도의 직접 인터뷰의 내용작성과 이것은 광주가 고향이고 현재 광주에 살고있는 예술가의 일이기에 기사화해 광주시민에게 알려야 한다, 는 광주신문사의 한상준 사장님의 결단과 김유림 기자님의 수고로 내고향 광주에 그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쁘신 시간중에도 화실을 직접 방문해 기사에 관한내용을 의논하고 기획해 주신 한상준사장님, 김유림기자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보이지 않게 뒤에서 응원해 주신 전상배 예총회장님도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주시에 저보다 더 훌륭한 화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전기를 기사화 해 주신 광주신문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제 삶의 남은 시간은 지금까지의 시간보다는 짧을 수도 있으나 지금까지 약 30여년간의 세월을 오직 그림의 한길로 왔듯이 남은 삶도 "광주가 낳은 화가"로 살다가 갈것입니다. 저의 전기를 읽어주신 독자님들과 가정에 평안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도선장 원작자 유 충열 올림.

 

 

 

 

 

 

 

 

 

 

 

 

 

 

 

 

 

 

 

 

 

 

 

 

 

 

 

 

 

 

 

 

 

 

 

 

 

 

 

 

 

 

 

 

 

 

 

 

 

 

 

 

 

 

 

 

 

 

 

 

 

 

 

 

 

 

 

 

 

 

 

 

 

 

 

 

 

 

 

 

 

 

 

 

 

 

 

김유림  gjilbo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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